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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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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6. 09:21 횃불/1996년

발람(6)

W. W. 페러데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백성

발락은 깜짝 놀라며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한 말에 분개했다.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23:11). 발람은 자신이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고 답변할 수 밖에 없었다. 발락이 그 즉시 그 선지자를 나라 밖으로 쫓아내지 않은 것이 놀랍지 않은가? 슬프게도 육신은 하나님이 관계된 곳에서는 언제나 어리석고 완고하다!( 1:22, 4:18) 왕은 다른 곳에 가서 다시 해보자고 제안했다. 사단은 그 마음이 진실로 그분에게 복종치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사람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미혹하는지!

발락은 발람을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거기서 일곱 단을 쌓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다. 그러한 고안과 위치의 변화가 그분의 백성에 관한 그분의 마음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왕이나 선지자나 그들의 창조주에 대해 얼마나 미흡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아합시대에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던 아람 왕과 그의 모사들도 똑같이 어리석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계곡의 신이 아니라 산의 신이므로 아람군이 평지에서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왕상 209).

발람은 발락에게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라고 일렀다. 여기서 여호와란 단어는 원문에는 없는 삽입어이다. 그는 사실 여호와를 만나러 가지 않았으며 그분이 다시 그의 길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24:1에 그가 쾌락을 찾아갔다고 분명히 나와있다(흠정역 참조).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허락치 않으셨다. 이에 그분은 또다시 개입하여 발람에게 나타나 그 입에 말씀을 주어 가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고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사를 주목해보는 것은 우리 영혼에 크나큰 위안이 된다. 우리와 관계를 맺은 그 하나님은 우리와 원수 사이에 서기를기뻐하신다.

발람이 돌아왔을 때 발락이 던진 질문은 놀라웠다.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우리가 아는 대로는 그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기뻐하시는 것에 굴복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두번째 멧세지는 첫번째 것과 달리 모압 편에 좋은 소식이기를 바랬다.

 베드로가 그들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을 때 고넬료와 그 동료들이 보인 반응은 이것과 얼마나 대조되는가!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10:33). 그러한 영혼의 태도는 축복을 가져온다. 온 무리가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를 청종했으며 (아마도) 한 시간 남짓하여 모든 참석한 사람이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에스겔 시대에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고 서로 이야기 했다. 그들은 에스겔에게 가서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를 즐겼으나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자기 종에게 이르셨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3032), 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해 주시기를!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기뻐하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한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앉아서 아뢰기를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라고 했다(삼하 7:21),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다윗은 그의 집의 신실치 못함을 슬퍼하며 이렇게 고백해야 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삼하 23:5).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계획은 외관상 지체되는 듯 보일지라도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이 기뻐한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이 권능으로 강림하시는 사건을 대망한다.

사랑하는 독자여, 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그것을 읽고 묵상하고 그 모든 사실을 믿으라.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퉈가며 온갖 축복을 약속하고, 많은 길 잃은 영혼들은 상식이 혼돈에서 질서를 가져다 줄 줄로 기대한다. 그같이 육체를 신뢰하는자들에게는 정신적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확실하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정한 때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발람에게 돌아가 보자, 그의 두번째 강화의 서두는 심히 보배롭다.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23:18,19). 이 악한 화자(話者), 비록 그의 화인 맞은 양심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겠으나, 여기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진실로 식언치 않으실진대 왜 그는 메소보다미아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그분의 의견을 여쭈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의미도, 능력도 알지 못하는 말씀을 읽거나 심지어 발설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위험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불변하심의 위대한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시편 119:176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긴 시편 전체에 걸쳐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금은 보다 얼마나 더 보배로운지를 말하고 있다(발람은 마지막 항목에 대해서 시편 기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수기 23:19의 발람의 말은 거듭해서 읽을 가치가 있다. 사실 그 말은 악인의 입술을 통해 나왔으나 그 근원은 하나님의 성령이었다. 민수기 23:19 곁에 나란히 놓아야 할 다른 성경구절이 있다. 사무엘상 15:29에서 사울은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한데 대해 책망을 듣고 그 나라가 그에게서 취해질 것이라는 예고와 함께 다음과 같은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그 엄위한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에 있어서만 아니라 그 심판에 있어서도 신실하고 확실하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의 엄위로 인해 떨게 될 모든 이들에게 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지! ( 11:22)

발람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셨다는 골자의 내용인 그의 첫번째 강화에서 진전된 내용을 볼 수 있다. , 그는 부정적인데서 긍정적인데로 나아가서 그가 축복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라는 그의 덧붙인 말은 악의 적이었다. 그는 보상을 바라고 그 축복을 돌이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이, 자신은 그분의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이키기에 무력하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이제 우리는 여호와의 두번째의 중심 주제에 이르게 된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그들의 허물과 패역으로 가득했다. 그 백성을 사랑한 모세는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옴으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고 회상해야 했다( 9:24). 이후에 여러 선지자들은 출애굽에서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동안 그 백성이 줄곧 죄악을 범한 과정을 되새겼다( 1, 32: 20). 그러나 발람은 비스가 꼭대기에서 그들에 관한 그러한 놀라운 선언을 하도록 지시 받았다! 아울러 그가 이스라엘(“하나님과 함께 한 왕”)이란 은혜의 이름뿐 아니라 야곱(“탄원자”) 이란 자연적인 이름도 사용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와 같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한 완전한 해설이 로마서에서 발견된다.

어떤 의()의 원리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대적으로 하여금, 그분이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하도록 하실 수 있었는가? 다음과 같은 소중한 사실들을 살펴 보라:

(1) 하나님께서 애굽인의 악을 심판하시던 그 두려운 밤에 그분은 압제자들만큼 악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양의 피 아래 보호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한결 두려운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 것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2) 발람이 그 곳에 이르기 얼마 전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원망에 대해 징벌을 내리실 때에 그분은 죽어가는 죄인들을 위해 놋뱀을 예비하셨다. 그 놋뱀은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고, 그분의 큰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옛 자아가 심판을 받은, 높이 들리운 인자를 상징해 준다. 

(3) 게다가, 이스라엘 진영 한 가운데는 피 묻은 시은좌가 있는 성막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것들-어린양, 놋뱀, 시은좌-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그분의 온전한 사역을 말해 주었다.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그분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와 일치되게, 그분의 백성을 축복하되 풍성히 축복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러나 이것이 진리 전체일까?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잘못은 그분 보시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까? 다른 이들은 엄하게 정죄하시면서 저들은 눈감아 주실까? 그분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원리로 자기 백성을 다루신다. 은혜를 거스린 죄는 은혜를 모르는 중에 범한 죄보다 한결 가증스러우며, 따라서 하나님의 징벌이 행해진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3:2), 이것이 그분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의 원리이다. 시편 제4 (혹은 민수기”)의 첫 편인 시편 90편은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악한 행실과,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치리를 목도하고 이렇게 진술한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0:8). 이것은 민수기 23:21과 모순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발람은 의로운 기초에 의지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도록 강건함을 받은 데 비해 모세는 하나님의 치리에 대해 표현한 것이다. 이 두 진리는 적절한 균형이 유지되도록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본 단원을 결론짓기 전에 이 중요한 문제로 돌아가보자.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또 다른 소중한 진리를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성막 위의 구름이 그것을 증거해 주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상상을 뛰어 넘는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고린도전서 6:20에서는 성령께서 모든 개개의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치며, 고린도전서 3:16에서는 성도들이 집합적으로 그분의 성전을 이룬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것은 이 세대의 놀라운 잊혀진 진리, 즉 이 세대의 가장 위대한 경이(驚異) 중 하나요 가장 풍성한 축복 중 하나인데도 실제로는 잊혀진 진리이다.

오순절 당시 교회에 어떤 능력이 엿보였는가! 만일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분의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엄청난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면 어떤 능력을 경험하게 되겠는가! 고린도전서 14:2325에는 낯선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거기서 역사하는 능력에 감화를 받은 나머지 그 마음의 은밀한 것들을 드러내고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참으로 그분의 백성 중에 계신다고 고백하게 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라고 발람은 덧붙였다. 이것은 앞 일을 내다보고 한 말이다. 하나님은 이미 성막을 통해서 그들 중에 거하셨으나 왕은 아직 임하시지 않았다. 그 왕은 다윗을 가리킨 것이 아니며 사울은 더더욱 아니며,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이 여호와의 택하신 왕이다(삼상 2:10). 그분은 장차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24:23).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적은 대장부 같고 그들 자신은 메뚜기 같다고 보고한 그들의 불신앙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만일 그들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 해내신 그 하나님에 의해 가나안인들을 조사했다면 달리 보고했을 것이나 그들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3:30-33). 갈렙과 여호수아는 대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능력의 부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너무도 종종 우리는 그 능력을 사용할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축복과 의롭다 하심을 입은 백성이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며, 하나님이 충만한 능력으로 거하시는 백성-에 관한 그 모든 놀라운 사실들을 선포한 후에, 발람은 그들을 대적할 목 적으로 불러내려 한 그 가증스런 세력들이 아무 힘도 쓸 수 없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해야 했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23:23) 하나님의 백 성은 마침내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영구히 기념케 될 것이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 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미가서 5:8,9은 메시아의 권능의 날에 있을 이스라엘의 승리에 관해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가 로마서 16:20에 진술되어 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마지막 아담께서 그 집요한 평강의 훼방자를 멸하실 때 교회는 그분과 놀랍게 연합될 것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장차 하나님이 이루신 행사를 보라.”고 고백될 것이며, 교회에 대해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2:7).

 

(1996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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