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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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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3. 09:04 횃불/1997년

말씀의 거울에 비쳐본 사역자상(2)

이 춘 원

 가르치기를 잘하며.” 감독의 자격 중에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책임입니다. 감독은 복음의 사역자로서 믿음과 구원의 도리를 잘 가르쳐 전하고 믿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성경적으로 지혜롭게 응답해 주어야 합니다. 감독은 참으로 영혼들을 사랑하고 구속의 복음 안으로 영혼들을 모으고 추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들을 주님의 은혜와 말씀 안에서 인격적으로 잘 다스리지 못하면 무질서하게 되고 제 갈길로 흩어져 버리게 됩니다

특히 가르치는 은사와 직분을 받은 장로는 말씀의 사역의 중요성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에 따라 모임의 신령상 형편을 잘 살펴 필요한 때 필요한 말씀과 권면과 위로를 공급해야 됩니다. 되는 대로, 그때 그때마다 생각 집히는 대로, 육신 대로, 이 얘기 저 얘기를 늘어 놓는다면 말씀 사역은 무너지는 것이며 그런 형제는 말씀의 은사가 없는 것이므로 강단에 나아가지 말 것입니다.

말씀 사역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전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 영혼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믿음생활 내지 교회생활이 흥하거나 망하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교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 안에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지시대로 한다고 하면서 아무나 불쑥 일어나 강단에 나가서 말씀을 강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거나 학문이 있거나 경험이 많거나 나이가 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 동안의 간증이나 깨달은 말씀이나 찬양을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자유는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교회 앞에 나아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시와 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온 교회가 인정하는 종, 곧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장로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딤전 5.17)을 더욱 더 존경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의 사역에 임하는 장로 형제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깊이 자신이 상고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말씀 곧 말씀 안에서 계시되고 깨달아지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는 자기를 항상 깨끗이 하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에 힘씁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그 영원하신 구속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주님 앞에 거리낌이 없이 나아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 깊이 묵상하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주의 성령님의 보여주시는 계시를 말씀 안에서 발견하고 깨닫게 됩니다. 만일 말씀으로 봉사하는 장로 사역자에게 계시의 영이 없이 육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이야기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말씀의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성경 곧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딤후 3:16, 벧후 1:21), 이것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육적으로 읽으면 재미가 없고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성령님이 그 사람의 심령을 열어 말씀을 보게 하실 때에는 그 말씀이 열려 깨닫게 되고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성령님을 제외시킨다면 그 말씀은 생명과 구원과 능력이 전혀 없는 이론적인 작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설교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문자적으로 알고 있고, 경험적으로 영적으로 생명적으로 직접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많이 설교하고 정성껏 힘들여 강론해도 신자들의 믿음과 교회의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없는 것은 설교자와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인 생각과 기준으로 전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초대교회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사도들의 영 속에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 생명의 진리의 말씀을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혹은 편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현대 문자로까지 번역이 되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그냥 문자적으로 읽는 정도라면 백날 동안 읽고 들어도 결코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내가 읽고 전하고 들을 때 내 영이 성령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빛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게 되는 순간 아멘하게 되고 할렐루야하게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 이니라”( 6:63). 사실 성경책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종이와 글씨와 표지로 되어 있는데 이것 자체에는 생명이나 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고 들어도 그냥 그 소리는 육적인 무익한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종교적인 모든 의식이나 예배나 헌금이나 봉사도 그 겉 모습이나 행동에서 무슨 생명이나 성령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내 몸과 혼과 영이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님 안에 충만히 거할 때 그 기름 부으심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자기 육신의 기준에 근거한 생각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이론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을 때 주님께서 직접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니 그제야 저희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주님께서 떡을 떼어 저희들에게 주셔서 직접 먹었을 때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24:1335).

주님께서 그 생명의 떡을 주어 먹게 하셨을 때 제자들의 감겼던 영안이 열렸듯이 설교하는 사역자들이 먼저 성령님의 기름부음 안에 충만히 거하고 성령께서 깨닫도록 계시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증거할 때 듣는 자들이 살아나고 깨어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곧 진리의 성령님께서 영적인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죄인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자기 지식과 교만으로 잠자는 신자들을 다시 깨워 일으켜 세울 수 있고 침침한 눈병을 맑고 밝게 완치시킬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사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성격과 진로와 상태가 달라지고 모임의 성장과 부흥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들은 우선 성령님의 계시해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말씀하셨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이 말씀을 보고 어떤 형제는 필자에게 술을 좀 먹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5:18, 딤전 5:23).

이 말씀의 교훈으로 볼 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나, 물없는 지역에서 음료수로 마시기 위한 경우에 술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술을 금하고 있고 술을 즐기거나 취하는 작태와 병폐를 금하고 있습니다. 술과 혼합한 술과 포도주는 먹지도 말고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재앙과 분쟁과 원망과 까닭없는 창상이 생기고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이고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하고,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격과 믿음과 생활과 그 간증이 더러워지고 망신스럽게 됩니다 패망하게 만듭니다. 정말 포도주와 온갖 술은 사람을 떠들게 만들고 교만케 하고 눈을 붉게 하고 거룩과 지혜와 명철을 빼앗아 갑니다( 23:2935).

필자는 여기서 영적인 교훈을 받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못될 것을 위하여 돈과 자기 몸과 정신을 몽롱하게 내어놓지 말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술을 즐겨 취하지 말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지 말 것입니다. 일락(세상의 향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으며,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고, 그런 것은 모두가 세상 정욕적인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딤전 5:6, 요일 2:1517).

목사의 엄한 가정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릴 때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나,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세상적인 호기심이 때때로 일어나고, 쓸데없는 취미와 음식에 대한 욕심과 공장에서 생산된 온갖 종류의 음료수와 추어탕과 영양탕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계속 찾아 다니는 것은 합당한 자세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금주운동에 앞장을 선 목사들과 각계의 지도자들이 하루 종일 모여 금주에 관한 세미나를 하면서 술의 하루 소비량보다 더 많은 커피를 계속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주님, 제가 술은 전혀 먹지 않고 있사오나 그런 사람들과 같이 다른 세상적인 것들에 더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때때로 세상적인 것들을 좋아하고 육신적인 옛 습관과 욕심이 생겨 옆 시장을 곁눈질하지 않도록 저를 각성시켜 주시옵소서, 술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오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도록 인도해 주소서.

레위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사역을 수행할 때에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것처럼( 10:810) 저 역시 세상적인 술에 취하지 않도록 날마다 교훈해 주소서 제사장들이 술을 마시면 거룩하고 속된 것과 정하고 부정한 것과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저 역시 주님의 뜻과 제 뜻을, 그리고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소경이 되지 않게 하소서.

 

구타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을 때리는 사람이 어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구령사업에 헌신할 수가 있으리요. 구타는 살인 직전의 행위이며 마귀가 쓰는 잔인한 무기입니다. 구타는 술을 먹거나 감정이 상하거나 분노의 경우나 사람을 미워하거나 하여 때리는 무자비한 비인격적인 폭력입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라고 하셨는데(딤후 2:24) 만일 다투게 되면 육신이 살아서 욕을 하고 밀치고 때리게 되는 정신없는 흥분 상태로 빠지게 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필자도 부끄럽게 분노를 한 경우도 있으나 그 순간 형제를 미워하게 되고 더러운 말이 입에서 나올 수도 있고 육체적인 충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교회와 말씀이 나를 옳다고 보더라도 절대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과 다투거나 구타를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못이 없는 경우에도 계속 참지 않고 싸우거나 구타를 하면 도리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선은 그냥 순수하게 있을 때 선이지 악과 함께 뒤범벅이 되면 죄가 되고 맙니다.

필자가 실패한 때도 옛날에 있었지만 그 이후에 어떤 중대한 교리적이고 당파적인 큰 문제로 인하여 어떤 형제들이 몰려와서 나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성령님께서 제단에 올려진 양처럼 자신을 온순케 만들어 그들과 똑 같은 후욕과 폭력을 나타내지 않도록 지켜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내 속에 계신 주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나 자신과 여러 성도들이 구원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항상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 취할 태도는 모든 사람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부드럽고 정중하게 대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원리 원칙만을 찾거나 내 잘한 것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상대가 잘못한 경우에도 그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그의 입장과 처지에 까지 내려가서 그를 도와주고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눈 감아주고 조장해 주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사리를 분별할 경우에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할 뿐이지 그 이상의 지나친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37).

사역자는 지나친 말이나 불평하고 비난하는 말이나 더러운 농담이나 거칠은 폭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이고 인격적인 합당한 언어 구사를 할 수 있고 때로는 입에 자갈을 물고 있듯이 과묵할 줄도 아는 것이 참 사역자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사역자들은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또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카운셀러이기 때문에 항상 언어 구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관용하며.” 관용은 미덕입니다. 너그럽게 타인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에게서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함을 참으로 받은 믿음의 경험이 있는 성도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나는 나를 쉽게 용서해 주지만, 나는 남을 쉽게 용서해 주지 못하는 것이 죄인의 속성입니다. 남을 참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인격과 심령이 넓고 깊은 사람입니다. 관용은 유덕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관용이란 단어가 7번 나오고 있는데 그 원어적인 의미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너그러움, 온화, 은혜로움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관용이란 단어가 있는 문장을 찾아보면 대부분 관용이란 단어의 앞뒤에 온유, 다투지 아니함, 화평, 양순, 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은 온유하고 양순하고 선한 마음과 태도를 가졌습니다. 관용의 정신으로 인하여 남과 다툼을 피하고 원수를 맺지 않고 화평스런 인간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복음과 말씀의 사역자가 너그러운 용서와 부드러운 사랑의 자세가 없다면 죄인들에게 접근할 수 없고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구속의 복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 어떤 죄인이라도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기쁜 소식인데 그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가 무정하고 비판적이고 너그러운 포용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죄인들은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사랑의 부드러운 그물에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이론적인 말씀의 진리만을 강론하면 영혼들이 딱딱하게 튕기지만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넘친 관용의 복음을 전하면 뭇 영혼들의 심령이 부드럽게 녹게 되고 마지막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랑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죄인이 죄를 졌다고 해도 용서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끝까지 불신하는 죄가 가장 크고 지옥 형벌을 자초하는 마지막 죄이지만, 그런 죄인도 최후 그 순간에라도 믿기만 하면 십자가의 한 강도와 같이 구원을 받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은 죄도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기에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신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자신을 드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출교라고 하는 가장 크고 무서운 징계를 받은 신자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관용해 주는 심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죄를 범해 출교로써 징계를 받았으나 우리는 그를 한 몸된 지체요 한 피를 나눈 성도로서 불쌍히 여기고 그의 회복을 위하여 간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계속 심판하고 정죄하고 더럽게 여기고 비판하는 것은 성도가 취할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 죄에 관여하지 말고 또 범죄한 그와 한 짝이 되어 그의 범한 죄를 면역시키거나 또 뻔뻔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지 말 것이며, 모임을 돌보는 장로들이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 나아가도록 의탁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징계는 사랑의 채찍이요 수술하는 의사의 메스와 같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과 함께 이 엄청난 일을 하는 사역자는 범죄한 환자의 생사가 걸려있는 수술이라는 징계를 다룰 때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그 일에 임할 것입니다. 그가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를 사랑과 진실로써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도와줄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는 죄인들의 도피처가 되고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찾아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죄인도 다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1997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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