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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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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4. 10:33 횃불/1997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7)

 

6. 적용의 원리

곡조가 쉽고 정서에 맞아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중 다음처럼 유감스럽게도 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치는 것이 있다. 찬송가에서 교리를 끌어내서는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내 것이네.

모든 장, 모든 절, 모든 단어,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

성경의 모든 약속은 내 것이라네.”

이 찬송은 성경의 모든 약속이 내 것이라고 두번이나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좋게 들리나 진리가 아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이 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은 그들과 맺으신 것이지 우리와 맺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고, 또 변치 않을 왕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성경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서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성경구절은 그것이 쓰여진 상황 속에서, 그리고 원래 누구를 향해 한 말이었는지와 관련하여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석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 구절을 우리에게 올바로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할 때에도 성경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경구절은 그것을 성경 다른 부분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적용할 때에, 매우 다양하며 풍성하게 적용될 수 있고 또 이렇게 적용된 것은 참되며 그 구절의 깊이를 더욱 드러내 준다.

성경을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문맥에서 이리저리 빼내어 무슨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대단한 비유로 해석하거나, 또는 온갖 기발한 공상들을 그 구절 속에 집어넣은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만일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을 읽는다면,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시저의 한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시저를 죽이려는 음모가 성공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안토니는 시저의 장례식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한다.

친구들이여, 로마인이여, 시민들이여, 나에게 여러분의 귀를 빌려주시오. 나는 시저를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장례하기 위해 왔소. 사람들이 저지른 악은 그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으나 선은 종종 뼈와 함께 묻혀 버리죠. 시저의 경우도 그렇게 되게 합시다.”

이 구절을 성경 해석자들이 종종 그렇게 하듯이 영적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이다.

안토니는 로마 공화정의 죽음과 영광스럽고 새로운 전제군주 형태의 정부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시민들이여라는 표현은 세가지 형태의 정부를 뜻한다: ‘친구들은 로마의 건국 초기에 있었던 족장 형태의 정부를 가리키며, ‘로마인들은 그 다음 시기의 귀족 형태의 정부를 말하며, ‘시민들은 로마의 이상이었던 민주정치, 평민 형태의 정부를 나타낸다. 부르투스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이고, 카시우스는 자유 민주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정치적 편리성이며 시저는 국가이고 안토니는 정치체제이다.”

이 연설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는 넌센스일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주로 플르타르크가 쓴 역사서에 근거해 드라마를 썼고, 전혀 정치적 설교나 비밀스러운 의미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의 드라마에서 이런 것을 찾아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줄리어스 시저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톨킨(J. R. R. Tolkien)은 사람들이 자기의 3부작 반지의 주인에 대해 어리석은 해석을 이끌어낼까 두려워 서문에서 이렇게 명백히 밝혀 놓고 있다.

알레고리나 주제별 인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견해나 취향에 따라 여러 장치(해석방식)들을 고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알레고리를 사용하지 않으며, 또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 왔다. 적어도 내가 알레고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만큼 주도면밀해진 후부터는.” 그는 자신의 3부작이 알레고리일 수 있다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지 않으려 했다.

세상의 책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성경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므로 숨겨진 깊이가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많은 구절들은 겉으로는 숨겨져 있으나 예상못했던, 놀라운 일관된 진리를 이면에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면 이 숨겨진 진리를 알고 싶은 유혹을 종종 느끼게 된다. 만약 그 결과 성경진리의 전체적 방향과 일치하면 그같은 탐구는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굴파기해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생 라합과 붉은 줄,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나은 이야기, 물에 빠진 도끼를 엘리사가 건진 이야기,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에서 많은 훌륭한 구원 메시지가 나왔고, 요한계시록 3:20, 예레미야 애가 1:12, 여호수아 24:15에서 위대한 복음설교가 행해져 왔다. 성경을 이같이 다루는 것은 여기서 이끌어낸 교훈이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옳다.

한 성경구절은 기본적으로 단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다.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다루려는 사람은, 이 구절을 달리 적용하기 전에, 먼저 이 뜻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적용할 때에도 모든 성경 말씀에 적용되는 해석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인물을 묵상할 때 어떤 기발한 모형을 추구하지 말고 그 이야기 속에 내재한 원리들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당시의 상황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거나,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신 경우에만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빼앗아 가지 말라는 다윗의 기도( 51:11)는 요한복음 14:16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명백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기도내용이 될 수 없다.

사도행전 1:4을 따라서 우리가 성령 받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치면 고린도전서 12:13 말씀과 어긋난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잘 따를 때에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지 않을 수 있다. 단지 그 구절이 우리의 현재의 필요에 맞는다고 해서 그 말씀 본래의 의도에 관계없이 그것을 우리 생각에 맞추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해버릴 권리는 우리에게 전혀 주어져 있지 않다.

물론 여러 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구절도 있다. 토기장이 비유( 18), 천년왕국 후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는 것을 설명하거나, 우리의 부활한 몸을 묘사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혹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것을 주실 수 있는지 등으로 사용해 왔다.  이런 식으로 원래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적용이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풀어주셨는데, 이것은 명백히 이스라엘 국가와 관련되어 있다.  해석의 기본 원칙을 떠나 이 구절을 영해(靈解)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1997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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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