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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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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3. 09:12 횃불/1997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

성경의 상징들

 죤 필립스

 의사전달할 때에 상징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다. 특히 성경에는 많은 상징이 사용되었다. , , 별 같은 사물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외에 2차적인 뜻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어떤 것을 대신 나타내거나 상징해 준다. 상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금방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별과 줄무늬는 미국을 상징하고, 단풍나뭇잎은 캐나다를 상징하며, 불독은 영국을 상징 한다. 대영제국은 그 전성기 때에 사자로 상징화되기도 했다

때때로 하나의 상징물이 여러가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독수리는미국 뿐 아니라 독일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상징이 사용된 문맥이 그 상징이 나타내는 바를 정확히 알아내는데 가장 중요하다.

성경의 상징을 해석하는 원칙은 단순하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해석해 주신다. 그러므로 성경 밖으로 나가 상징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상징을 무시해 버리거나 혹은 너무 상징만을 중요시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또 상징이 바로 그 다음에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장에서 요한은 주님이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을 본 후,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라는 설명을 듣는다. 때로는 상징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런 상징들은 분명히 성경 안에서 설명되었다.

요한계시록 8:8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이 경우에도 성경은 상징을 스스로 설명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문맥에서가 아니라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설명할 뿐이다. 예레미야 51:25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맥을 통해서 그 산이 바벨론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산은 영토 확장주의자의 거대한 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사야 57:20,21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에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고, 예레미야 50:41,42보라 한 족속이 북방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파도(영어로는 바다)가 흉용함 같도다라고 쓰여 있다. 즉 바다(파도), ‘평안이 없는, 전쟁하며, 신음하는 나라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같은 단서를 가질 때 요한계시록 8:8의 상징을 이해하기 쉽게 된다. 언젠가 화산처럼 파괴적인 힘으로 불타는 한 거대한 나라가 인류라는 바다(파도)에 세차게 집어 던져질 것이다. 바다가 불붙은 산을 진압하려 할 때의 대 격동은 아마 굉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징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격렬한 전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상징을 다를 때, 성경 자체의 빛으로 조명해야지 오늘날 우리의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은 오늘날 러시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에서 곰은 페르시아(바사)를 의미한다. 게다가 성경의 기자들은 러시아의 곰을 전혀 몰랐다.

상징은 의사전달을 쉽게 만들 뿐 아니라 정확하게 하기도 한다. 어떤 단어는 때때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쓰이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거나, 의미까지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편 4:2어느 때까지····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에서 궤휼’(leasing)이라는 단어는 17세기에는 자주 쓰이던 단어이나 지금은 사어가 되었으므로 20세기의 독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당시 그 의미는 거짓’(falsehood)이었다.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전서 4: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앞서다는 단어가 킹제임스에는 방해하다’(prevent)로 나와 있는데 이 단어가 17세기 당시에는 앞서다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 단어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뀜으로써 구절 전체의 의미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위의 예처럼 그 차이가 현저한 경우는 많지는 않으며, 또 킹제임스의 수정본에는 이런 단어들이 고쳐져 있다.

이렇게 단어는 쓰이지 않게 되거나, 변할 수 있지만 상징은 이보다는 더 지속적이다. 어떤 상징의 의미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 의미를 계속 유지한다. 즉 상징 안에 내재된 원래 특징 때문에 그 의미가 보존된다. 예를 들어 태양은 권력, 권위, 통치의 상징이다. 태양계에서는 태양이 힘의 근원이므로 이런 개념이 원래 태양 자체에 내재해 있다.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처음으로 태양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을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하셨다. 창세기 1:15,16에서 보면, 하나님이 해와 달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1:16) 그래서 해와 달은 다스리는 힘을 상징하며, 특히 해는 가장 뛰어난 권위를, 달은 그 다음 권위를 나타낸다. 혹은 어떤 문맥에서는 해는 정치적 권력을, 달은 종교적 권위를 나타낼 수도 있다.

가끔 상징이 한 개 이상의 개념을 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령을 상징하지만 또한 침례깨끗케 함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야곱은 맏아들 르우벤의 변하기 쉬운 성품을 물의 끓음 같다”(as weak as water)고 말하고 있다( 49:4). 이 때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향하는 성질, 즉 연약함을 상징한다. 사자(lion)도 바벨론 제국과 사단과 그리스도와 같이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반대로 어떤 사물이 여러 개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단은 사자(lion), , 광명의 천사, 용으로 나오며, 성령은 비둘기, , , 바람, 기름으로 표현된다.

성경 자체가 상징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살펴봄으로써 상징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안전한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단서에 주목해야 엉터리 같은 근거 없는 해석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욥기 41:134은 매우 상징적이고 시적으로 어떤 거대한 물에 사는 동물(우리말 성경에는 악어로 나와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리워야단을 낚시로 낚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전체적인 문맥은 욥의 무지함, 한계, 연약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이 현대의 잠수함을 예언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오는 사단과 천사의 권세를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한 부분을 헬리콥터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문맥을 보면 이 황충은 무저갱에서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헬리콥터일 수 없다.

더 중요한 성경의 상징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 이 책의 2부에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나타내는 성경의 상징들을 살펴보자.

이미 언급한 대로 성령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상징을 사용하셨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을 모두 다 언급하지는 않겠다. 예를 들어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우자를 구하러 그의 종을 보내는 장면에서 나오듯, 성령은 가끔 이름없는 종으로 상징된다. 만약 이 구절을 하나의 모형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이되고, 이삭은 그리스도이며, 이름없는 종은 성령님이 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성령께서 오늘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역사와 그 방식을 가르쳐 준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신다. 이름없는 종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 그의 겸손함, 성공 등, 이 모두는 오늘날 성령이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시는 방식을 밝히 보여준다

 

(1) 바람: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

성령이 처음 언급되는 성경구절은 창세기 1:2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ruach)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히브리어 루아후’(ruach)혹은 바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올바른 단어를 선택하려면 문맥을 봐야 한다. ‘루아후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389번 나오는데 237번은 ’(spirit)으로, 152번은 22개의 다른 단어로 킹제임스에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에서 영과 바람이 한 단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람은 성령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성령, 강력하고 볼 수 없으며 편재하시는 하나님 -능력과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 원하시는데로 갈 수 있으며, 원하시는 바를 하시며,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시대의 모든 먼지와 헝클어짐을 날려버리고, 인류 역사에 새롭고, 강력한 운동을 일으키시는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임하셨다.

그래서 성령은 바람으로 비유되었고, 성령께서 인간에 처음으로 말씀하신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성령의 이름이 바람과 동일한 단어가 된 것이다. 바람처럼 성령께선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 부분을 가장 잘 나타낸 곳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장면이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며 , 바리새인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니고데모의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다. 더군다나 거듭남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고 못을 박으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논쟁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왜요?”라고 묻지 않고 어떻게”(거듭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보낸 오랜 세월의 종교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영혼에 들어온 적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에게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물, 두번째로는 바람을 들어 설명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3:8).

니고데모는 육체의 출생을 경험했다. 이젠 영적인 출생이 필요하다. 육체의 태어남이 법칙에 따른 것이듯 영적인 태어남도 법칙대로 된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 출생 환경에 아무런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는 있으나 출생의 법칙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는 바람의 움직임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바람을 조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시키는 능력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그 때문이다. 성령께서 지금 움직이신다. 그러므로 지금이 반응을 보일 때인 것이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성령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같은 집회에서 어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때로 성령께서 어떤 나라에 부흥을 가져다 주신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가 부흥을 명령할 수는 없다.

이제 창세기 1:2로 돌아가보자. 여기에서도 성령의 움직임이 바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께서 마치 어두운 인간의 마음같은 흑암 위, 깊음 위에서 운행하고 계셨다.

그리고나서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옴으로써 빛이 생겼고, 빛이 주위를 밝혀 주었다. 바울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은 맨 먼저 어두움을 다루신 다음 최초의 세계의 죽어있음을 다루셨다. 그리고 지금 성령께서는 인간의 영혼의 어두움과 죽어있음을 다루신다.

 

(2) : 부흥시키시는 능력

물은 성경에서 두 가지 상징으로 나온다. 깨끗케하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고, 마시는 물은 성령의 상징이다

성령은 목마른 사람에게 그를 소생시키는 물과 같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장면에서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처음에는 반석을 쳤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0:4). 당시의 반석이셨던 주 예수께서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5).

이런 찬송도 있다

여호와께서 매를 드셨도다.

, 주핌, 당신이 맞으셨나이다.

당신이 당신의 하나님께 맞으셨고

나는 맞지 않았나이다.

매가 지나간 곳에 피가 흐르고

당신이 맞음으로 내가 나았나이다.”

반석이 맞음으로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 이스라엘은 칼날로 쳐 이길 수 있었다.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하고 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성령을 물로 표현한 대표적인 곳은 요한복음 7:3739이다. 명절 끝날 예수님께서 서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절은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은 한 해의 맨 마지막 절기이며, 가장 큰 명절이며, 그 모형이 천년 통치를 예표하는 명절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초막절 기간동안 재미 있는 의식이 생겨나 예루살렘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7일 동안 제사장들이 줄지어 실로암 연못이나 기드론 시냇가로 가서 황금으로 된 잔에 물을 채워 성전으로 가져와 위대한 찬양’(Great Mallei)이라는 찬송을 불렀다. 이 찬송은 시편 113118편으로 되어 있다. 이 시편은 실제로 오순절, 유월절, 초막절에 낭송되었다.

이렇게 황금잔에 물을 채워 온 제사장들은 성전뜰에서 이 물을 부어 수정같이 맑게 흐르도록 했다. 이는 구약성경에 나와있는 명령은 아니나 아주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전통이었다. 이 물을 붓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물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다는 것. 언젠가 사막에 장미같은 꽃들이 필 것이며 이 강물이 황무지를 에덴동산으로 바꾸리라는 것.

8일째 되던 날은 물을 붓지 않았다.  명절 끝날인 가장 큰날에는 황금잔, 행진, 강물이 없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지금 약속의 땅에 있으며 물을 초자연적으로 공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

물을 붓는 것이 상징하는 영적인 소생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

이런 것들이 그 배경이 되었다 바로 그 날, 갈보리를 앞두고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에게 생수의 강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의미한다고 성령께서 명백히 기록하셨다. “이는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으로, 예수님은 생수의 샘으로, 성령님은 생수의 강으로 비유된다. 강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 소생하는 축복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말한다.

 

(3) : 연단시키는 능력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로 된 갈라진 혀처럼 임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신비로운 불꽃이 각 사람들 위에 임했고, 사도들은 이 때부터 변화된다. 즉 깨끗하게 정제된 것이다. 베드로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며. 도마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빌립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불을 붙였던 것이다.

 

(4) 기름: 부흥케하는 능력

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 상징은 기름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은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을 상징한다.  가장 유명한 구절로는 열처녀 비유가 있다( 25).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는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그들 모두 처녀였으며, ()을 가졌으며, 등 안에 기름이 있었으며, 다 졸며 자고 있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미련한 처녀는 예비한 기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등의 의미는 분명하다. 시편 119:107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등은 기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성령이 공급하시는 힘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조명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성경은 죽어있는 책이다.  에 소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이 때문에 성경을 인용하는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빛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없이 성경에서 빛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릇은 개인의 생명을 가리킨다. 다윗은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破器)와 같으니이다”( 31:12)라고 말했으며,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 9:15)이며, 남편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벧전 3:7)으로 돌봐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이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고후 4:7)이다.

따라서 여분의 기름을 그릇(우리말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에 담아 두었던 처녀들은 등을 다시 켤 수 있었고 이것이 참된 신자와, 믿는다고 말만하는 거짓 신자를 구분시켜준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릇 안에 기름을 담고 있다. 즉 그들의 삶 가운데 성령이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은 항상, 심지어 졸고 있을 때에도 져져 있다.

 

(5) 비둘기: 방향을 잡아주시는 능력

비둘기도 성령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비둘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성자 하나님 위에 머물렀다. 이제 성령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끄신다.

내가 어렸을 적에, 가끔 기차역에서 몇 시간동안 놀곤 했다. 역은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런던에서 웨일즈로 가는 커다란 철도가 놓여 있었다. 기차를 쳐다보는 것은 참 매혹적이었다. 몰려드는 사람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경도 그러했다. 급행열차는 긴 화물칸을 달고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고 작은 기차들도 조그만 역들을 향해 떠나갔다.

어느 날 나는 버드나무 가지로 엮어진 바구니를 보았다. 짐을 나르는 아저씨가 설명해 주기를, 그 안에는 집으로 돌아 오도록 훈련받은 비둘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비둘기들은 기차에 태워져 거리가 같은 여러 역으로 운반되었다가 정해진 시간에 동시에 하늘로 날려 보낸다는 것이다. 그때 비둘기들은 한 두 바퀴 하늘을 돌고는 자기 집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이끄신다.

 

(1997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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