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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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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12:22 횃불/1997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C. H. 매킨토쉬

5. 두 부활

  독자들 중에는 이 제목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 표준 교리와 신앙고백을 통하여 처음부터 이 위대한 문제에 익숙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실은 이 두 부활에 대한 개념을 그들이 한 번도 깨달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고 확실한 용어로 두 가지의 부활, 즉 시기에 있어서나 그 특성에 있어서 분명한 생명의 부활심판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부활 사이에는 천 년의 기간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들이 만일 신학체계를 세우고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반대되는 신조와 신앙고백을 주장한다면, 자신들의 지도에 자기 자신들을 위탁하는 사람들이 그래야만 하듯이, 그들의 주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할 일이다.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 거룩한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은혜로운 의무라는 점이다.

  그러면, 서두에 진술했던 주제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경건한 마음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먼저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주목할 만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5:2429).

  이 말씀에서 두 부활에 대하여 뚜렷한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에 대하여는 아니지만, 각기 그 특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이 보다 더 명료한 대조가 있겠는가. 이 양자가 뒤죽박죽이 된 혼합 부활 이론을 세울 여지란 아무것도 없다. 믿는 자들의 부활은 선택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원리로 이루어지며,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부활처럼 동일한 특성을 취하게 될 것이다. , 성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 될 것이다. 이는 구속에 기초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질 일로서, 구속함을 입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천년 동안 무덤 속에 남겨진 채,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다( 20:5).

  마가복음 9장에는 이 주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의 서두에는 예수께서 변화하심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뒤따른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9:9,10).

  제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는데, 비록 그들이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실제로 그랬다. 부활의 실재는 그들에게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빌립보서 3장으로 옮겨가서, 이 장엄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 영광스럽고 거룩한 소망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말을 경청해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10,11).

  잠시만 생각해 보면 사도가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이유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폭 넓게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이 사도 앞에는 특별한 일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 서의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토대로 이뤄질 선택적 부활이었다. 이것이 사도가 끊임없이 기다려 온 일이었다. 이것이 그의 영혼에 비치고, 그의 유별한 이력인 슬픔과 시련, 수모와 고난 그리고 모든 수난과 영적 싸움에서 그를 격려해 주던 밝고 복된 소망이었다.

  그러나, “사도가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이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4 15절을 살펴보자.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 말씀에 그 주제에 대한 그리스도인과 천상적인 면이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는 마가복음 9장에 나타난 제자들 보다도 휠씬 더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소망에 전혀 이를 수 없는 자들에게 사도가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둘로, 아나니아, 벨릭스와 같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가 어떻게 자기 믿음을 털어 놓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의 특별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소망에 대하여 진술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단지 정통 유대인에게 공통되는 부활의 위대한 진리를 근거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언급했다면, “저희의 기다리는 바라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종류를 그들이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4장에서,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이 사도와 빌립보서 3장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자기 속에 있는 복스러운 소망을 고백하는 사도와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이 후자에 대해,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완연히 비치고 있는 그 빛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할 수 있다.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때에 만족하게 될 생명의 부활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품은 채, 깊은 생각과 느낌 그리고 가슴 뜨겁게 지녀온 열망을 사도는 진술할 수 있다.  그러나 잠시 우리가 처음에 인용했던 요한복음 5장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두 부류에 대해 ”(hour)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셔서 독자들 중에는 부활 소망의 진리를 붙드는데 어려움을 겪는 분도 있을는지 모른다. 논쟁이 되는 문제는 이렇다. “주님께서 한 때(hour)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어떻게 두 부활 사이에 천년의 기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이중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5절에서 라는 완전히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주님은 죽은 영혼들을 일으키시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을 언급하고 계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여기 천구백 년을 넘도록 지속되어 온 사역이 있다. 그 기간 동안 여기에 언급한 ”(hour)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져서 귀한 영혼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부름이 있어왔다. 그러므로 만일 주님께서, 바로 그 동일한 가르침 중에서, 근 이천 년으로 이미 연장된 기간을 언급하는 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면, 그 단어를 천 년의 기간에 적용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실로, 우리가 판단해 볼 때,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다면, 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5,6). 이 말씀은, 모든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기꺼이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모든 의문을 철저히 그리고 영원히 해결해 준다. 두 부활 즉,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있을 것이며, 이 두 부활 사이에 천 년의 기간이 존재할 것이다. 첫째 부활에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과(히브리서 12장을 참조하면 분명해질 것이다), 장자들의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휴거와 그리스도께서 짐승과 군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19) 나타나실 때 사이의 전 기간인 대환난기간 동안,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 속한다.

  이와 반대로, 둘째 부활에는, 가인의 시대(4)부터 천년왕국의 영광 중에 있을 최후의 배교자( 20)까지, 자기의 죄로 죽은 모든 자들이 포함될 것이다.

  얼마나 엄숙하고, 얼마나 실제적인 일인가!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압도하는 일인가! 만일 오늘 밤에 주님께서 오신다면, 공동묘지와 무덤들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그 순간의 장엄한 실재를 어떻게 필설로 묘사하며, 어떤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분토와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의 재가 뒤섞인 채 누워 있는 무덤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같은 모습의 허다한 납골당이 여기 저기에 있다. , 이제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장의 소리가 울리니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에 오르게 될 것이다.  자기 죄로 죽은 자들을 무덤의 어둠과 침묵 속에 천년 동안 남겨둔 채.

  그렇다. 독자들이여,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명백한 증거이다. 이 증거는 기묘한 사항들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불건전한 상상이나 자극하고 한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엄숙함과 중대함 곧, 생명의 부활과 그 영원한 영광에 대해, 그리고 심판의 부활과 그 영원한 참상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이 두 부활이 동시에 발생하는 혼합 부활과 같은 것은 성경에 전혀 없다. 이와 함께, 우리가 분별없이 받아들인, 또 신앙의 초기부터 익숙해져 온 이런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버려야 마땅하다.  이 잘못된 생각들은 우리가 자라면서 같이 자라고, 우리가 강해지면서 같이 강해져서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인 조직의 일부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것들을 단념하는 것은 마치 갈기갈기 뜯기고, 뼈에서 살을 찢어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바란다면 그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마음에 우리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사상으로 채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장애이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자면, 한 때 우리 대다수는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부활하여 함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리라는 생각을 지닌 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성경을 대할 때, 이 주제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더 명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시록 20 5절에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 년의 간격이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영혼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실로 그것은 불합리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명백한 사례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죽을 수 없는 존재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principles)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도 역시 똑같이 불합리하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언어는 아주 단순하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20:5). 어째서 이런 구절이 보여주는 간명한 증거를 애써 외면하는가? 왜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분별없이 간직하고 있는 낡은 관념을 당장 제거해 버리고, 덧붙인 말씀을 어찌해서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는가?

  독자여, 만일 성경이 첫째부활을 말한다면, 모두가 다 함께 부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이는 그대에게도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가? 만일 모두가 동시에 부활하는 것이라면, 부활에 대하여 어째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서술되고 있는가?

  편견에 빠지지 않고 신약성경을 연구한다면 혼합 부활 이론을 취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주님의 지체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특별한 부활을 하게 될 것은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때문이다. 진실로 그와 같이 성도들은 부활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 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다음 호에 계속)

 

(1997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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