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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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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31. 15:12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13장 창세기 5장의 영적인 사람들

5장에는 두 번째 이름의 목록이 나오는데, 이는 셋의 계보로서 우리에게 첫째는 가인에게서 보여지듯이 자연인이며, 둘째는 셋에게서 나타나듯이 영적인 사람이다. “ 우리의 목적은 4장에서처럼 한 구절 한 구절씩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을 특징짓는 일반적인 원리들을 파악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원리들이 그 장 전체를 흐르고 있는데 이는 믿는 신자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1절에서 창조가 인정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라는 진술은 얼마나 분명하고 뚜렷한가! 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부인한 4장의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삶과 생각의 원천이요 근본이 된다.

1절과 3절의 비교에서 볼 수 있듯이 타락 또한 기꺼이 인정되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1). 그러나 3절의 다음과 같은 변화는 교훈적이다.

아담이····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 구절 사이에 타락이 발생하였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다.  신약성경은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음을 말한다(고전 11:7). 그러나 신약 어디에도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 닮은 속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모양(image)은 지위의 개념을 나타내는 듯 한데, 다스리는 능력같은 것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도덕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하나님 닮음(likeness)은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으로부터 좇아내시며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추방하신 이유이다. 그 닮은 속성을 상실하자 인간은 하나님과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못했다. 오직 희생적인 한 죽음만이 이러한 문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영화로운 상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입장도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드려진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영접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로 십자가에서 타락한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머리됨(headship) 또한 여기에 연관되어 있다. 2절의 독특한 용어가 이 진리를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그들의 이름을 아담 즉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개정역).

그 여자의 이름은 하와였지만 그녀의 이름은 생략되었다. 사실 여기서는 어떠한 여자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 모두가 다 남자이고, 여자는 완전히 감추어진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자녀들을 낳으므로 그들의 부르심을 성취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과 그들 자신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아다, 실라 그리고 나아마라는 세 유명한 여인이 나타났던 창세기 4장과는 명백한 대조를 보인다.

여기서 아주 강조된 또 하나의 요점은 시간이다. 이러한 면에서 4장은 아무런 언급이 얼었다. 하지만 셋의 계보에서는 그 시간이 날과 년수로 측정된다. 5장에서는 각 인물이 몇 년씩을 살았는지 계속해서 언급된다. 몇 가지 실제적인 점을 생각해보자.

 

(1)그들은 그들 자신이 지상에서 단지 잠시 동안 살며, 그들의 삶이 시간에 의해 통제됨을 인식했다. 시간의 개념은 영원의 개념으로 이끌고, 시간의 짧음은 일종의 확신이 된다. 이것은 고린도 후서 4 18절의 말씀처럼 여러 면에서 관점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2) 시간의 가치를 배우고 최대한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사라-역자 주)”고 에베소서 5:16에서 말했던 바울은 또한 때가 단축하여졌다고 고린도전서 729절에서 말했다. 베드로 사도 또한 베드로전서 4 3절에서 다음과 같이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

그리고 2절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창세기 5장의 계보의 각 사람은 그의 시대에 그리스도께 이르는 하나님을 위한 충성된 씨를 심었던 것이다.

 

(3) 므두셀라의 경우에는 그가 죽으면 올 것이 온다라는 홍수의 도래를 의미하는 그의 이름이 또 다른 시간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 시대의 때와 징조를 인식한 것이며, 그 일들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누가복음 12 56절에서 주님은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갈면서도 은혜의 주님이 임하신 그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주님과 사도들에 의해 사용된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에서 시대라는 단어는 은혜 또는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이것은 특히 므두셀라의 출생 후에 하나님과 삼백 년 동안 동행했던 에녹에게서 보여진다(22). 아마도 그 아들의 출생시에 그 이름과 의미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후의 에녹의 생애는 전적으로 변화된 참된 회심의 이야기였다.

우리 시대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이름을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의 이름을 본 따거나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짓는다. 어떤 때는 그 이름이 출생 당시의 상황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는데, 사무엘상 4 21절의 이가봇의 경우가 그러했고, 주께로부터 주어진 아들이기를 희망하면서 하와가 이름했던 가인의 경우에는 부모의 영감으로 이름이 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세례 요한 또는 마태복음 1 21절의 우리 주님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인한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적어도 에녹은 주님의 말씀에 응답했으며, 그 결과는 300년 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므두셀라보다 휠씬 크신 우리 주님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죄로부터 건지실 수 있는 그분께로 나오기를 거절하였다.

단순히 수학적인 계산을 해보면 므두셀라의 출생시에 경고가 주어졌음이 명백해진다. 그는 969세를 살았다. 그가 라멕을 낳았을 때 187세였고, 라멕은 182 때에 노아를 낳았다. 그때 므두셀라는 369세였다. 거기에 노아가 600세에 홍수가 일어났기에 더하면 969가 된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은 바로 그 해에 이 땅에 홍수가 임했던 것이다. 신자는 바로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날이 도래할 그 때를 인식할 수 있는가? 죄악이 가득차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사건들이 잇따르고 말세가 우리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노아의 때를 언급하면서 실제로 주님은 말세에 성도들이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하셨다.

에녹을 위해서 하나님은 홍수로부터 보존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예비하셨다. 그는 들림 받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취하여 가셨다. 그는 성경에서 최초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며, 유다서 14절이 알려주듯이 처음으로 예언을 하였으며, 최초로 휴거된 사람이었다. 세상은 매우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은 거할 곳이 없으셨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함께 동행하였다.

4장과는 달리 5장의 이 계보에서 또 하나의 주요한 차이점은 계속적으로 죽음이 언급된 것이다. “그가 죽었더라라는 짧은 구절이 5,8,11,1417,20,27절 그리고 31절에 거듭 언급되었다. 매우 오래 살았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단지 잠시동안 임을 인식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하나의 실재였지만 4장의 사람들은 그것을 가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청년이 살해된 것 외에는 그들의 수명도 그들의 죽음에 관한 사실도 기록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5장의 사람들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네라고 말하는 것이었으며, 이같은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바보의 낙원같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지켜준 것이었다.

간과되기 쉬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그 구절에서 죽었다는 단어가 여덟 번 나타난 것이다. 8은 부활, 혹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수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의 아들 이삭이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입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1장에서 제사장 스가랴는 8번째 순서로 아비야 반열이었는데,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세례 요한의 출생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나중에 그는 그 장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예언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은 죽었지만 부활을 소망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유업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는 히브리서 11 13절의 말씀이 잘 들어 맞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사망아, 무덤아,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 세상은 그들의 본향이 아니었다.

그들의 출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의 가족, 나이 그리고 죽음 등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들의 소유, 업적들 그리고 발전상황 등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음은 주목할 만하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바 되는데 이것이 진정 중요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에녹은 예외인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물론 다른이들도 그러했을 것인데 에녹은 므두셀라의 출생이후부터 그러했다는 것과 나중에 휴거한 것이 독특하다.

가인의 후예들은 세상과 동행했으며. 세상의 소유와 오락과 보이는 것들을 즐기며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부패와 폭력 가운데서 살았다. 하지만 셋의 후예들은 이 세상 정욕을 떠나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살았다.

두 장의 각 계보에 에녹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그들은 서로 전혀 달랐다. 그 이름은 헌신된이란 뜻이다. 4장의 에녹은 그의 이름을 본 딴 성을 짓는 등이 세상에 그의 이름을 남기는데 그의 삶을 헌신했다. 5장의 에녹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 11:10). 전자는 보이지만 일시적인 것들을 바란 반면, 후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을 바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후세에까지 기억된 것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다는 점이다. 가인은 그의 아들을 기쁘게 했지만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11:5).

셋의 후손은 또한 그 저주를 인식했다(29). 타락이 그 장의 첫 부분에 언급되다가 저주가 그 끝 부분에 언급되었다. 4장에는 저주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자연적인 상태에 처한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지식이 없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29절에서 볼 때 라멕은 분명히 저주의 무게와 그로 인한 수고를 느꼈고 그 끔찍한 상태 가운데 남겨졌다.

여기 4장의 사람들이 결코 꿈꿀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이다. 그 위대한 소망이 신자들의 마음을 흥분케 한다. 라멕의 예언에서 어느 날엔가 그 저주가 제해질 것을 약속한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메시아이신 의로우신 주 예수님이 오실 때, 그분은 계시록 22 3절의 분명한 가르침처럼 천년왕국 기간동안 그 저주를 제하실 것이다. 어쩌면 그 저주는 홍수 이후 새로운 질서 가운데로 들어갈 노아를 통해 좀 경감될 것이다. 하지만 그 완전한 제거는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황금시대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에녹의 경우처럼 4장의 라멕과 5장의 라멕을 대조해 볼 수 있다. 전자의 라멕은 죄를 가리고자 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후자의 라멕은 그 저주를 제하는 선지자로 나타난다. 전자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랑하지만 후자는 다른 사람, 즉 노아(실제로는 주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랑한다. 라멕은 이라는 뜻이다. 4장의 라멕은 자신을 자랑하지만 자신이 단지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아는데 실패한다.  5장의 라멕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자신 저주를 긍정하며 오실 메시아이신 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한다.

이 예언은 라멕만이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 에녹 또한 유다서 14절의 말씀과도 같이 주의 오심에 대해 예언했다. 그러므로 4장의 사람들의 길은 암흑이며 5장의 신자들의 길은 예언의 밝은 빛이 비친다.

예언의 점진성을 주목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에녹은 주의 오심과 그 결과로 인한 심판에 대해 말했다. 라멕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로 더 나아간 예언을 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계시가 점진적임을 아는데, 이것이 바로 그 같은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5장의 경건한 사람들의 믿음은 최신식이었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일치를 이룬다. 그들은 우리처럼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었다.

 

(1)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남은 자들은 노아와 방주가 하나의 놀라운 모형이 된다.

(2) 사람을 포함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

(3)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지구에 저주가 임한 것.

(4) 에녹의 휴거.

(5) 영광 가운데 주님이 재림하면서 세상과 불경건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

(6) 남자의 머리됨.

(7) 다가올 천년왕국

 

그 계보에서 세 이름이 두드러지는데 그들에 대한 논평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은 축복을 받았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라멕은 그 저주가 제해질 것을 소망했다. 이 세 가지는 에베소서의 잘 알려진 구분과도 아름답게 연결된다.

13장은 신자의 부요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다. 그처럼 아담은 복을 받았고 그의 머리됨은 뚜렸했으며 그리스도를 고대했다.

4,5장은 신자의 행함으로써 다섯 번 그 단어가 나오는데 각각 그 형태가 다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연결된다.

6장은 신자의 영적 싸움으로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저주와의 싸움을 하며 성령으로 예언의 말씀을 선포했던 라멕과 연결된다.

슬프게도 타락의 증거는 지금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시작은 잘하지만 곧 타락하고 만다. 노아가 600세 되었을 때 세상에는 타락과 폭력이 가득찼다. 노아만이 주님께 받아들여질만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6장을 기다려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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