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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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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31. 15:14 횃불/1998년

레위기의 다섯 제사(5)

5. 속죄제

 

※ 참고 구절 : 레위기 4, 5 113, 6 2430, 시편 22, 고린도후서 5 21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피흘림의 제사는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 드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가 전자에 속하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후자에 속합니다.

 

 번제 예물은 집으로 가져와 먹지 않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의 증거로 예물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그 예물을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흠 없고 점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덧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을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번제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같이 쓸모없는 자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로 덧입혀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분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욕되게 했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 분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의 흠 없으신 인성을 우러러 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또한 단순히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이끌리는 것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려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번제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시며 갈보리를 넘겨다 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하실 모든 축복의 일을 하나님은 미리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누가 이 일이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 일인지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창세기 8 20,21절에는 노아가 새로워진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번제를 올렸는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의 향기를 흠향하셨다고 기록되었으며 다른 번역에는 안식의 향기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를 기쁨으로 여기셨으니, 이 제사의 본질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예식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업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를 살펴보면 그 제사에 포함된 또 하나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화목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예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다른 사람들과도 교제합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 중 일부만 단 위에 불살라지는,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가 완전한 자이심을 기뻐하시는 표시입니다.

 흔든 어깨는 제사장 아론과 그의 식구의 음식이 됩니다. 어깨는 힘이 솟는 부위로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먹는 의미는 어깨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과, 실패함이 없는 강인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은 흔든 가슴살을 먹습니다. 가슴살은 애정과 사랑을 상징하며 제사장이 구원자에게서 나오는 온유한 사랑을 먹고 살 것을 말합니다.

 예물을 드리는 자는 일가 친지들을 불러모아 함께 앉아 화목제의 남은 부분을 먹습니다. 이 모든 부분이 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화목제의 예물을 놓고, 하나님과 아론과 그의 식구, 예식을 주관하는 제사장, 예물을 드리는 자와 그의 친구들 모두 다 함께 잔치를 즐기며 행복한 교제를 나눕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십자가에서 평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와 신성한 교제를 나누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다른 관점으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셔서 심판을 받으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제가 필요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를 구분짓는 일이 꽤 난해한 듯합니다. 그러나 속죄제는 죄인이 갖고 있는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죄성의 표현을 죄로 보았습니다. 속건제는 죄를 사람이 전혀 갚을 수 없으나 누군가가 반드시 갚아야 할 빚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제가 우리의 악한 속성에만 초점을 두고 행하는 예식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레위기 4장과 5장에 실제의 범법행위가 나열되는데 이러한 행위는 타락한 본성이 표출되는 모습입니다. 내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깨끗하지 못한 자,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적합한 자입니다. 내 악한 행위는 이 사실이 겉으로 나타난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속죄제물 또한 다른 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 21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죄제물은 어원상 신구약성경에서 같은 의미를 지니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제물로 삼으셨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을 보면 성령은 속죄제물이야말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갈보리 십자가의 희생제물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 5,6절에 시편 40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업적 속에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신 일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사는 화목제의 뜻으로, “예물은 소제로, “번제는 번제 그 자체로, “속죄제는 속죄제와 속건제의 뜻으로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 1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12절에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라는 두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로 일을 완성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레위기 4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는 이러한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고의로 짓는 죄에 대하여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속죄하는 제사는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한 제사이며, 십자가의 보혈 이후로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고의적인 죄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끝내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밖의 모든 죄는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믿지 못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무지의 죄로 간주하십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무지로 인하여 죄를 범합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은엄청난 죄에서 돌이키도록 충고한 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3:17)라 하며 무지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대하여 이 세대의 관원(세상의 왕)이 하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고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은총의 말씀입니까! 전대미문의 가장 큰 범죄를 하나님께서는 무지의 소치로 간주하시다니요!

 그러므로 속죄제는 구원을 받고자 하는 어느 누구도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행적이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동정과 사랑으로,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한 자에게 관용의 문을 활짝 열고 굽어 살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을 거절한다면 그 무지에 대하여 더 이상 호소할 수 없으며,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함을 얻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십자가의 속죄를 부끄러움 속에 남겨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짓 죄”( 10:26)에 해당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사함이 없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엄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짓 죄를 범한 자는 타락한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비췸을 얻은 자, 즉 복음을 알고 그 진리를 수긍하고 있으나 고의로 진리에 대하여 등을 돌린 자를 말씀하는 것으로, 끝내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여 마음에 시인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아무 은총도 예비되어 있지 않으니(왜냐하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얻을 수 없으며, 다른 속죄제는 없기 때문에),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10:27)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가엾은 죄인들은 속죄제로 인하여 자기의 죄가 영원히 옮겨졌음을 알게 됩니다.

 

레위기 4장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13).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22).

 

 이상의 말씀들을 볼 때 속죄제를 드리는 데는 등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할 경우는 수송아지를 끌어와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제사장 한 사람의 제물의 의미가 아니라 전 회중을 위한 제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족장이 범죄하였을 때는 흠 없는 염소새끼나 어린 양을 드려야 했습니다. 한편 평민인 경우는 가축 떼의 암컷 중에서 새끼 염소나 어린 양을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레위기 5 1113절에 보면 아무리 가난한 자의 보잘것없는 제물일지라도 다 응답하셨습니다.

 맡겨진 직임에 따라서 각자의 책임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할 경우는 전 회중이 범죄한 것만큼이나 무겁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까이에서 지내는 외형적 특권이 있기 때문에 책임이 더 막중했습니다. 족장은 제사장보다는 덜 했지만 평민보다는 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더 받은 자는 더 큰 특권이 주어지며 그와 함께 책임도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만큼, 그 분량에 따라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가 접한 놀라운 진리로 인하여 자신이 높아진 나머지 연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들에게 거침이 된다면 이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거듭된 속죄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모든 죄가 십자가에 처리된 사실을 재삼 음미하여야 합니다.

 

속죄제 예식

 

 제사 예식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모두 상고할 필요는 없으나 제사장이 행하는 부분만은 깊이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사장은 속죄제를 지내기 위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여호와 앞에 끌어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 씌워 우리를 위해 예물로 드리는 예식입니다. 회막문 앞, 여호와 앞으로 끌고 온 흠 없는 송아지에 안수하고 직접 잡아 예물이 곧 자기 자신임을 상기합니다.

 예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그 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회막 안으로 들어가 손가락에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피를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전부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피를 전부 번제단 밑에 쏟는 예식은 그리스도의 피가 십자가 아래로 쏟아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땅은 그 피를 들이마셨습니다. 땅은 창조자의 피를 마셨습니다. 피흘림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준 이 사실을 두고 레위기 17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거룩하고 흠없고 순결하고 깨끗한 생명이, 속사람이나 겉사람이나 모두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음에 내어 준 바 되었으니, 이제 그분을 의지하는 우리가 이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느 생명으로 살아감도 아니고

여느 죽음으로 죽어감도 아니네.

또 하나의 생명, 또 하나의 죽음에

나는 영생으로 합하네.

 

 회막 안으로 가져간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여기 이 땅 위에서 완성될 것을 말합니다. 그 피를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향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부었습니다. 번제단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의미하며, 향단은 하늘에서 이루실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떨어져 있던 이 둘이 다시 연결되었은즉 십자가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제사장이 속죄 제물된 수송아지의 내장의 모든 기름과 두 콩팥을 떼어냅니다. 내장의 기름과 두 콩팥을 떼어내려면 먼저 제물이 피를 쏟고 죽어야 합니다. 떼어낸 모든 기름과 두 콩팥을 번제단 위에 태웁니다. 이 태우는 목적은 여호와 앞에 향기로 상달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에 죄를 입었기 때문에 저주의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머리, 다리, 내장, , 곧 수송아지 전체는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다가 나무 위에 놓고 불사릅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3 11,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우리를 이끌어 빛 가운데 거하게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함으로 영생을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바깥으로 가셨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문둥병자가 진 밖으로 쫓겨나가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 밖은 깨끗하지 못한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한히 거룩한 분이시나 우리의 속제제물이 되셔서, 깨끗하지 못한 곳으로 버려지는 자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본래 그곳은 더러운 것을 버리는 곳이지만 희생물을 불태운 곳은 정결한 곳이라 불리웠으니 실제로 불결한 것이 그 속에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적인 고난을 당함으로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채찍 맞은 일, 헤롯 법정에서 받은 군중의 야유, 가시 면류관, 매맞음, 이러한 것만으로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깊은데서 고난을 당하시므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의가 이루어져 죄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6시간 동안 곤혹의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을 우리는 말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6시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3시부터 제6시까지, 오전 9부터 정오까지로 이 시간 동안에는 햇빛이 내리쬐고 말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6시부터 제9시까지는 정오부터 오후 3까지의 시간으로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암흑의 시간 동안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는 어두움이 걷혀가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이 속죄 예물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분이 버림을 당하심으로 속죄함을 받은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자가 진 밖으로 쫓겨나듯, 속죄제물이 진 밖에서 불에 태워지듯, 죄를 입은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당하셨으나 그분은 본래 가장 거룩한 분이시며 그분 안에는 죄가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이 버림받고 불살라진 그곳이 정결한 곳이었습니다.

 

레위기 5 14절에 여러 등급의 죄의 허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혹시 부지중에 사람의 부정에 다닥쳤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이 말씀 또한 죄를 우리 본성 속에 잠재하고 있는 깨끗하지 못한 부정한 것이 밖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절에는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죄를 고백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범죄한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자기가 범죄한 그 실제의 행위를 알면 이것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 9절의 말씀이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는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죄를 깨닫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것이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행위가 됩니다. 반드시 확실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확실한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5 6절에서 13절 말씀은 백성 중 가장 가난한 자들까지 고려하셔서 예비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조금밖에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보통 평민들의 경우는 어린 양이나 염소의 암컷으로 속죄제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7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빈궁함을 염두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이스라엘 백성 중 이런 제물까지 예비할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해 11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제사장은 이를 기념물로 한 움큼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름으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이 제물을 드리는 일은 피흘림은 없으나 죄인의 자리에 대신 서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물에 기름이나 유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제물만 가져와도 그 제물을 받으십니다. 즉 죄인들에게 용서함을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조금밖에 깨닫지 못하여도 하나님은 이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이 비할 바 없는 자상하신 은총이여!

 

속죄제의 규례

 

 6 24절부터 30절은 속죄제의 규례입니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릴 때 해야 할 것과 그에 사용되는 집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중에 지극히 거룩하니라는 말씀이 두 번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낮아져 우리를 위해 죄를 입은 자가 되었다고 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비천한 자로 여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부정한 자가 아니며 부정한 자가 될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속죄제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주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내 영혼 깊이 새겨 주소서! 주여, 내가 무엇이관대 거룩하신 당신께서 나의 죄를 취하셨나이까?

 

 속죄제물 중 일부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사장이 먹는 것은 죄가 아니라 제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먹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죄나 혹은 남이 지은 죄를 지니고 살아도 죄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성소에서 속죄제물을 먹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30절의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그 피를 휘장 안에 뿌리지 않은 희생 예물의 어떤 부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완전히 동참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우리는 미약한 정도밖에 깨닫지 못하며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마음과 능력이 너무 빈약합니다.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69: 20) 우리는 심히 낙담하게 되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성경을 좀더 상고해 보면 우리가 참으로 거룩한 곳에서 희생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암시를 볼 수 있습니다. `속죄제 시편이라 할 수 있는 시편 22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실 때 그분의 거룩한 영혼이 겪은 고난에 우리가 어느 정도는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예법으로 속죄물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죄인의 자리에 서게 하심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을 잃어진 자들에게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총을 거부하고 이 사랑을 짓밟는 사람의 죄과는 어떠하겠습니까? 그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는 것”( 10:27)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소식을 듣는 자들이 이 사랑하심과 은총을 저버리고 무서운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요한복음 3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6 9절에도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함은 고의적인 죄로써, 회개함이 없다면 사함도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 죄를 없이하려고 죽으신 그리스도 그분을 거절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도 그를 구원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 고의적으로 끝까지 대속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짓밟는 것이요, 그분의 귀중한 속죄의 피를 거룩함이 없는 예사로운 일로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박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개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죽으심과 값 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공의로운 진노가 내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99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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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