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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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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31. 15:13 횃불/1998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21)

 

성경의 이름들

성경은 사람과 장소로 가득차 있어서 이름으로 된 책이라 할만하다. 이 지구에 맨 처음 살게 된 사람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주셨다( 5:2).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첫 번째 임무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데려오시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2:19). 아담이 지어준 이름들은 틀림없이 의미가 있었을 것이고 동물들의 모습, 기능, 특성, 습관 등을 지적으로 평가하고 붙였을 것이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이름이 임의로 붙여진게 아니라 사건, 희망, 믿음의 행사, 혹은 어떤 영감의 원천과 자주 연관되었다. 예를 들어 에녹은 자기 아들을 므두셀라라 불렀다( 5:21). 에녹은 선지자였으며( 14),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그냥 붙인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이 아이의 출생은 그 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므두셀라의 뜻은 그가 죽으면 그것이 오리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므두셀라의 이름은 실제로 예언이었으며 이 이름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므두셀라는 969년동안 즉, 거의 천년을 어느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은혜의 날을 이같이 연장시켜 주셨다. 므두셀라가 죽자 곧 이어 심판의 물이 세상에 밀려들었다. 은혜의 날이 지난 것이다.

예언이 므두셀라라는 이름에 영감을 주었다면 야곱이라는 이름은 당혹감 때문에 지었다. 야곱은 쌍둥이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이 성경에 어느 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5:2126). 리브가가 아이를 가졌을 때, 뱃 속의 소란스러움으로 고통스러웠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胎()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라를 섬기리라”( 25:23). 그리고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25:25,26).

에서는 붉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서의 후손의 역사는 진실로 붉었다. 에돔의 역사는 헤롯 대왕에게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의 남자 아이를 대량 학살하여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자이다.

야곱의 뜻은 남의 자리에 밀어내고 앉은 사람’,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다. ‘발꿈치는 요즘으로는 팔을 비튼다혹은 속이다는 뜻이 있다. 야곱은 자기 이름에 어울리게 살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에서 야곱은 계획을 세우고, 음모를 꾸미고 일구이언하며 형, 아버지, 외삼촌 라반을 그렇게 대한다. 물론 라반은 야곱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브니엘에서 만나 그를 굴복시키고 깨뜨리시며 축복하시고 그 이름을 하나님의 왕이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실 때까지 그러했다.

야곱의 후손은 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 불리우는 것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 목표가 이 민족의 역사, 운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민족이 얼마나 목이 곧고 반항적이었는지! 반면에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고 은혜로우신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46:11).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시편 기록자가 여기서 셀라라는 후렴구를 붙여 놓았다-”당신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의미로 성경에 있는 매우 많은 이름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치 성경의 모든 이름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장소의 이름도 그렇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을 생각해 보자. 이 이름엔 평화의 뜻이 담겨있다. 성경에서 이 도시()가 처음 언급될 때 살렘, 즉 평화라고 불리우고 있다( 14:18). 유대인은 오늘날까지도 살롬이 인사말이다. 아브라함이 동방의 왕들과 전쟁에 이긴 후 만난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었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아브라함을 만나····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7:1,2).

요점은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분 안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 85:10)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강의 도시 예루살렘은 이제껏 역사 가운데서 거의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이렇게 많이 정복당하고, 전쟁을 겪고, 불타고, 약탈당한 도시가 또 있었던가? 그러나 어느 날 이 도시는 진실로 평화의 도시, 이 지상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매우 엄밀하게 쓰였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대체로 자신의 이름을 통해 계시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3개의 이름이 있었다. 첫째가 엘로힘(Elohim)’이다. 가끔은 엘(El)이나 엘라(Elah)로 축약되기도 한다. 이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 1:1)에서는 창조와 관련되어 있고 창조자라는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엘로힘’()아라’(행세하다, 즉 신실함을 뜻함)가 합쳐진 단수, 복수 다 쓰이는 대명사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 세 분임은 창세기 1:26에 분명히 나와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다시 말하면 삼위일체가 하나님에 관한 계시 가운데 처음 이렇게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이름은 여호와이다. 이 이름은 영원하신 분’,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 3:14). 여호와라는 단어는(여기서 야훼가 나온다) “되다”, 알려지다는 뜻이고 계속적인 자기 계시를 가리킨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언약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성경에 처음으로 나온다( 2:4).

세 번째 이름은 아돈혹은 아도나이이고 일반적으로 주()로 번역한다.  이 이름의 기본적인 뜻은 주인이란 뜻이다. ‘아돈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주인을, ‘아도님은 소유주로서, 자기 소유를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주인을 뜻한다. ‘아도나이는 이 세상에 자신의 목적인 축복을 가져다 주시는 주인의 뜻이다. ‘통치자, 소유주, 축복하시는 분이 이 이름에 담겨있는 뜻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 기본적인 이름 외에도 혹은 여호와와 함께 쓰인 이름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엘 샤다이’( 17:1), 즉 전능하신 분이다. ‘샤다이’(여인의 가슴을 의미함)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먹이시고, 힘을 주시고, 만족케하시고 자신을 믿는 자의 삶 속에 부어주시기 때문에 샤다이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엘리온이다( 14:18). ‘엘리온가장 높은의 뜻이므로 그분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다. 이 이름은 특별히 하늘과 땅의 소유주로서의 하나님과 연관된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으신이의 아들( 1:35)로 묘사할 때 쓰였다.

하나님은 -오람’( 21:33),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히브리어 오람비밀혹은 숨겨진 것혹은 고대의 것과 관련되어 쓰였다. 비밀, 숨겨진 것과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이 단어에 결합되어 있다. 그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면서 영원한 것을 조종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엘로힘’, 즉 여호와 하나님이다( 2:4).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1:26)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엘로힘이셨다. 이제 사람이 만들어지고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는 위치를 주신 후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 엘로힘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므로 특별히 사람과 관련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도나이-여호와이다( 15:2). 이 합성어 이름은 두 단어의 특징적 의미를 모아 놓은 것이다. 보통은 아도나이를 강조한 표현이다.

여호와 이레’( 22:14)는 보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고, ‘여호와 로페카’( 15:26)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메카디쉬겜( 31:13, 20:8, 20:12)은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샬롬’( 6:24)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사바오트(삼상 1:3)는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치드케누’( 23:6, 33:16)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엘론’( 7:17, 42:7)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 로이’( 23:1)는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으로 계시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특징이다. 이 부분을 보지 못하면 불완전한 성경해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필요에 대해 이같은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것으로 채울 수 없는 사람의 필요란 없을 것이다.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칭호도 또한 똑같이 중요하다.

첫째, 구약의 엘로힘에 해당하는 일반적 단어는 하나님(those)이다. 이 단어는 아버지 하나님께( 1:1, 17:24), 아들 하나님께( 1:28 1:1, 20:28),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5:3,4 비교)쓰였다. 심지어는 우상에게도 사용되었다( 7:43). 구약의 나는···· 이다라는 칭호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기 위해 쓰셨고( 8:58) 이는 출애굽기 3:14을 직접 인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주 예수께서 특별히 계시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유일한 관계를 나타내고, 또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쓰였다( 3:16, 20:17, 8:15).

전능하신 주’(pantokrator)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창조주,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 말할 때 쓰였다(고후 6:18, 1:8, 4:8, 21:22).

능하신 자’(potentate)는 디모데전서 6:15에 한 번만 나온다. 이 이름은 하나님을 능력의 왕, 통치자로 나타낸다. 영어로는 왕조’(dynasty)에 해당한다.

신약에서는 ’()라는 이름이 하나님 대신에 자주 쓰인다. 이 단어 주(Lord)는 두 개의 헬라어와 한 개의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다. 첫째는 퀴리오스’(kurios), 즉 소유주라는 뜻이다( 19:33). 이 단어는 소유자가 가진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데, 여호와에게 쓰이고( 1:22, 2:15, 1:6, 10:2, 1:23, 12:13), 그리스도께( 21:3, 2:28, 1:45, 6:34, 8:11) 쓰였다. 또한 이 단어가 6‘sir’로 번역되었다( 4:11,15,19,49, 5:7, 20:15, 우리말 성경에는 모두 로 되어 있음-역주). ‘로 번역된 두 번째 단어는 데스포테스’(despotes)이다. 이 단어도 소유주를 나타내나, 하늘과 땅에서 더욱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위와 권력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데스’(des: 묶다)포우스’(pous: )이 합쳐진 단어다. 이 단어는 신약에 10번 나오며 5번은 주인’(master)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여호와( 2:29, 4:24, 6:10)와 그리스도(벧후 2:1, 4)에게 쓰였다. (Lord)로 번역된 아람어 단어는 랍오니’(rabboni’, 10:51, 20:16)이며 주인 혹은 선생이란 뜻이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그리스도께 사용되었고( 1:23) 이는 이사야 7:14에서 인용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예수’(구약에서는 여호수아, 요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이란 뜻이며 우리 주님의 사람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에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으며( 2:8),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며( 1:21) 사람들은 그분을 예수라 부르지 못하고 항상 ’(, master)라 불렀고( 13:13,14, 6:46) 단지 귀신들만이 직접 예수라 불렀다( 8:29). 또 그분을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직접 불렀다. 그리고 주님께서 항상 그렇게 부른 귀신들을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 예수이다. 이 순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이름)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직책)가 부차적 의미를 갖는다.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뜻할 뿐이다. 서신서에서는, 자신을 낮추셨으나 이제는 높아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영광 받으신 예수님이 강조된다. 그리스도 예수로 표현될 때는 그리스도(직책)가 중요하고 예수(이름)가 부차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번 낮아지셨다 다시 높아지시고 영광받으신 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주라는 표현은 신약에 한 번 나온다( 2:11). 이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인데 비슷한 주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누가복음 2:26에 나온다.

주인’(master)이라는 칭호도 신약에서 자주 쓰인다. 8개의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처음 3개는 주(Lord)로도 번역되었다. ‘퀴리오스’(kurios: 13:35, 6:9, 4:1), ‘데스포테스’(despotes), ‘랍오니’(rabboni), ‘오이코데스포테스’(oikodespotes: 10:25: 13:25, 14:21: 주님의 비유에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사용하신 집주인의 뜻), ‘에페스타테스’(epistates’, 5:5, 8:24,25, 9:33,49, 17:13: ‘명령자라는 뜻), ‘디다스칼로스’(didaskalos, 8:19, 4:38, 14:14, 8:49, 13:13,  5060번 쯤 나오며 선생님의 뜻), ‘카데게테스’(kathegetes, 23:8,10: ‘인도자’, ‘지도자의 뜻), ‘랍비’(rabbi: 1:38, 3:2, 4:31, 11:8: ‘선생님’).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아버지와 아들 나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1:20, 1:31,35), 주님을 만물의 상속자라 말하며( 1:2), 사망을 정복하신 분( 1:4)으로 나타낸다.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인자’(사람의 아들)이다. 이는 88번 나오며 매우 특별한 칭호이다. 이 칭호는 예수님을, 첫 사람 아담이 저버린, 이 지상에서의 지배권을 가진 분으로 나타낸다. 맨 처음 나오는 곳은 마태복음 8:20머리 둘 곳 없으신 사람의 아들이시며, 두 번째는 그 다음 장에 나오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며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9:6). 예수님을 인자(人子)로 표현하는 것의 모든 구절은 복음서에 있다. 이 칭호에는 항상 정관사가 붙어있다(구약, 특히 에스겔서에 나오는 단순히 사람을 가리키는 인자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한 편, 스데반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인자로 본다( 7:56). 요한계시록에서도 두 번 인자로 표현되며( 1:13, 14:14), 이는 지상에 하나님으로 다시 내려오실 분으로 나와 있다. 인자로 처음 나온 부분(머리 둘 곳 없으신 분)과 마지막으로 나오는 부분(머리에 금 면류관을 그고 손에 이한 낫을 들고 계신 분)은 엄청난 대조를 이룬다.

성경의 이름과 칭호, 특히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수백개의 인물명, 장소명 및 그 주변 환경을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살펴야 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름은 어원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사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문제는 여전히 있다. 사전에는 하나의 뜻 외에도 또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어는 자음만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된 단어에 모음을 넣어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문장인 경우 문장 자체에 모음을 넣는 단서가 보통은 나와있다. 그러나 이름은 다르다. 이름은 보통 문맥에서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고 그래서 자음에 다른 모음을 집어넣게 되면 스펠링 자체가 애매하게 된다.

성경의 이름이 여러 뜻을 갖고 있으므로, 그 이름에 어떤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려면 조심해야 한다. 이름의 뜻이 분명한 경우 그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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