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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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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은사들

W.E. 바인

 

고린도전서 12장의 앞부분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를 주시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다음에 사도는 영적인 은사와 그 활용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지역교회에 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말이다. 이처럼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결과들을 가져온다. 즉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사의 근원이 되시고 은사를 나눠주시고, 은사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심을 본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4-6).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같음”을 일곱 번 언급한다. 이렇게 하여 조화와 하나됨이라는 근본적인 요소를 확실히 강조한다 “같음”이라는 단어는 삼위 하나님께 가장 먼저 사용된다.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하나님은 같으니." 그런 후에 9-11절에서는 “같은 성령”이 네 번 반복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서 전체 교회를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몸이 여기서는 칠중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연합체로 강조된다. 여기서는 삼위 하나님 뿐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근본적인 특징들도 자세히 말해준다.

교회의 특징들은 세 가지이다. 그것들은 은사의 소유와 섬김의 형태와 은사의 사용이다. 즉 은사들, 섬김들, 행함들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 번째로 이 다양한 은사들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따라 개인들에게 나눠진다. 각 사람이 은사를 소유하도록 말이다. 두 번째로 다양한 종류의 직무 혹은 섬김이 행해진다.1)

1)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직무“ 곧 섬김의 형태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행정"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바도 지배력의 행사가 아니다. 은사의 경우 그것은 카리스마티이다. 즉 은혜로 얻은 선물이다(유용성을 말해줌). “행함"(활동성)에네르게마티이다

 

은사의 목록은 8-10절에서 그리고 28절에서 제시된다. 전자는 실행되어야 하는 기능들과 관련된다. 한편, 후자는 그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특히 관련된다. 이 목록들은 공식적이지 않고 은사들을 총망라하지도 않는다. 여기의 순서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 은사들이 언급되는 커다란 목적은 이것들이 하나님께 근원 을 두고 있음을 알리는 데에 있고 이것들이 수여된 이유를 알리는 데에 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7). 따라서 각 사람이 은사를 올 바르게 활용할 때 그것은 사람을 통로로 하여 성령님께서 나타내시는 능력을 증거해준다. 이렇게 될 때 둘 다 유익을 얻는다. 즉 은사를 소유한 이와 교회의 구성원들이 다 유익을 경험한다. 은사가 주어지는 이유는 사람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에 있지 않다. 그 이 유는 성도들을 세우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은사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성령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데에 목적을 둔다.

 

일시적인 은사와 영구적인 은사

은사들은 시도시대에 교회들에서 기능했다. 이 중 어떤 은사들은 그 시대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다른 은사들은 영구적으로 기능하도록 주어졌다. 이러한 차이점은 이후의 내용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예컨대, 당시의 일시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은사로 주어졌다. 그들은 믿음의 진리들이 세워지도록 터를 놓았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계시들을 말함으로써 그들은 완전한 터를 놓았고 이러한 터에다가 추가할 교리는 없다. 그러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맡은 특별한 임무는 영감 받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끝이 났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계시로 임한 모든 것과 그들이 교회들에 서 행한 구두 증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방언과 예언

방금까지 언급한 일시적인 성격의 섬김 뿐 아니라 사도시대의 특별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다른 은사들도 주어졌다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지들을 위하는 표적이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지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1-22). 사도는 이 점을 명확히 말했다. 이사야 28:11-12절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미리 말해진 대로 그 백성은 이 증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이 지상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단되었다.2) 성령님의 능력이 기적적으로 나타났는데도 말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건에서 증거와 호소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징벌적인 표적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죽으시고 장사 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것을 행하셨다. 첫 번째로, 오순절날에 예루살렘에서 증거가 나타났다( 2:22-36). 두 번째로는 사마리아에서( 8:14-17) 세 번째로는 가이사랴에 있던 고넬료의 집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이 그러한 일을 경험했다. 분명 유대인들이었던 그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 터였다. 하지만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던"( 19:2) 그들이 바울이 안수하자 이렇게 되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나"(6). 사도행전이든지 아니면 다른 서신서들이든지 이러한 류의 나타남에 대하여 더 이상의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이 오순절날 후 12년 이내에 발생했다. 이때는 과도기로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특별히 다루신 기간이었다.

2) 방언의 은사는 해석함 없이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민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도 존재했다(고전 12:10). 그러나 두 은사 모두 열등한 은사였다(12:31, 14:1-2,12) 

 

치유

기적적인 “치유의 은사들”이 있다. 이것들 역시 사도 시대 동안에만 말씀 증거를 위해서 존재했다. 이와 달리, 성경은 밝혀주는 목적을 지닌 은사들은 영구적인 성격을 지녔다. 치유의 은사들은 표적 은사로서 한계를 지녔다. 이것은 디모데, 드로비모 가이오 등의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은사들을 사용한 이들은 분명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그렇게 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주어졌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나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9:40).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20:9-10).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또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실 수 있다. 다음 구절에서 말해주듯이 말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5:14-15). 그러나 이러한 사실과 사도 시대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일시적으로 수여되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이 원리는 언제든지 유효하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 후에도 또 교회가 완성된 후에도 이 원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가 가장 먼저 적용된 경우는 진리의 성경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주어진 까닭에 초자연적인 표적을 나타내도록 주어졌던 일시적인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했다는 말에 늘 현혹된다.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초자연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것은 황홀한 매력을 풍겨낸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빛 안에서 사는 이들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모든 것을 시험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들은 그와 같이 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4).

 

교회의 돌봄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돌보는 데에 헌신하는 이들의 사역과 그들에게 공급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이것을 신약성경은 끊임없이 또 일관되게 증거한다. 이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구절들은 그저 어떤 사실들을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즉 모든 교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사도 시대뿐만 아니라 현시대 전체를 포함해서 말이다. 다른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충분한 것이 되며 구속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께 충성스럽게 행하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고수하며 그분께 복종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추가 내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이 창안해 낸 것들은 제아무리 겉모습이 좋아 보이고 그럴듯해 보여도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지 못한다. 이는 성경이 말해주는 바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볼 때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사도들의 사역을 볼 때, 주님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따라서 사도 시대 이후에도 마땅히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인간의 견해와 편리를 위해 그 가르침을 변경하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인정을 받고자 소원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도록 하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해서 그와 같이 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그분에 대한 헌신이다.

 

교회의 감독들

이제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바를 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20장을 정밀히 살피는 것은 전혀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장로들이 감독들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복수의 장로들이 한 교회를 보살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20:17). 명백히 이 장로들은 그 도시의 교회에 몸담은 이들이었다.

이제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1)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0:28). 장로들은 감독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목자들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지역교회가 양무리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로들의 책무는 양무리를 보살피는 것이다. 이에 그들은 목자의 돌봄을 행한다. 그들은 목자로서 함께 지역교회를 돌본다.

실례로 제시되는 에베소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또한 루가오니아에서 이미 형성된 교회들에서도 각각 장로들이 세워진 터였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여2)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흠정역, 14:23). 이에 더하여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한 교회 안에 복수의 감독들이 있었다. 이후에 가서, 그레데 섬에서 디도는 다음과 같이 행했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1:5). 그러므로 한 교회를 한 명의 장로 혹은 감독이 주관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1) 이 단어는 에피스코포스를 문자 그대로 옮긴 말이다.

2) "임명하여"(흠정역)로 옮겨진 이 단어의 원어는 케이로토네오이다. 이 단어는 고린도후서 8:19절에서도 시용되었다.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통행하는 자라” 그런데 그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다른 데서 사용된 유일한 곳이다. 거기서는 고린도 교회의 한 형제가 유대로 연보를 전달하는 일을 위해 택함을 받은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 시도행전 14:23절에서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직수임식을 행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사도들은 이미 장로의 일을 잘 수행하는 이들을 택했을 따름이었다. 사도들뿐 아니라 교회들 역시 자신들의 인도자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이 구절이 명확히 말해주는 바이다. 양들은 자신들의 목자들을 선택하지 못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장로가 감독이다. 사도는 장로에게 요구되는 특성을 묘사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감독은 ... 책망할 것이 없고3)"( 1:7)라고 썼다. 디도서의 추신 부분이 흠정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레데 사람들의 교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받은 디도에게" 하지만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첫 번째로 디도는 감독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레데 사람들의 한 교회가 아니라 그레데에는 여러 교회들이 존재했다.

3) 여기에서 사용된 관사는 분명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지 않는다(고전 12:12 참조). 틀림없이 이 구절은 한 감독이 활동한다는 근거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다수의 장로들이 목자의 보살핌을 행했다. 이는 그 교회에게 건네진 권면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이 구절은 매우 교훈적이다. 장로들을 인정하도록 촉구한 이유는 교회의 복지가 장로들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장로들의 권위가 인간의 임명에 기초하지 말아야 함을 명확히 알게 된다. 즉 장로들은 어떤 개인에 의해서 혹은 교회의 선택에 의해서 세워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오직 주님께서 세우신다. 그렇다면 감독의 자격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 안에서 자신들을 다스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도록 지침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사도가 장로들을 임명하는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장로들은 성도들을 다스린다. 즉 주 안에서 양들을 인도하고 돌본다. 하지만 그들이 권위를 행사하는 영역은 영적인 문제들로 제한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3:7.17).

 

맡기운 자들의 돌봄

장로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교회 인도자들의 세 가지 특징이 여기서 다시 말해진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장로들(경험을 지님), 감독들(감독하는 일을 함) , 목자들(양무리를 보살핌)이다. 또한 “맡기운 자들"(클레로스)이라는 단어도 갚은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를 사람들은 주로 “성직자”라고 옮기는데 여기서 이 단어가 갖는 뜻은 “맡겨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 인도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돌봄을 받는 교회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기독교계는 비성경적인 영향력 및 인간의 견해와 전통이 지난 편견에 크게 사로잡혀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을 거꾸로 이야기한다! 중세 시대와 현대의 교회 체제들에서 우리는 여러 계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기초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반된다.

 

계급의 시작

사도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이탈하는 과정은 추적하기가 어렵지 않다. 인간의 교만과 경쟁, 지배력과 권력을 향한 갈구로 인해 교회의 임원 계급이 쉽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제시한 바와 크게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지위를 획득한다. 그 예로 우리는 디오드레베를 생각할 수 있다(요삼 9).

그들이 채택하는 방법은 투표를 통 해 교회의 임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기가 높거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선망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 결과 성령님을 의지함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증거들 대신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가 자리를 잡는다. 이와 같은 악은 처음엔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퍼져나가다가 마침내 보편화된다.

거짓 교사들은 기독교 신앙이란 유대교의 발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인도자들에 대해서도 평신도와 구별되는 제사장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이라고 선언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렁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직 너희는 ...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1 :6).

교회의 목사들은 전면에 나서서 육신적인 야망을 채우고 성직권주의를 지지하고 선전한다.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주후 109년에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주님 자신을 대하듯이 감독을 대해야 한다" 트랄레스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이 감독에게 복종하라" 또한 마그네시안스에 편지를 보내는 중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감독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 모든 일을 행하도록 권면한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도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다가 당신의 지극히 고귀한 감독과 당신의 장로회의 잘 만든 영적 면류관을 더하라."

신약성경의 원리들 및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행에서 뚜렷하게 이탈한 이러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 들였다.4) 이와 관련하여 딘 알포드가 사도행전 20:17,28절의 왜곡에 대하여 주해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 왜곡된 내용은 이레니우스가 주장한 것이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인접한 지역들의 감독들까지 불러 모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시대 초기에 나온 이와 같은 불순하고 옳지 못한 해석은 성경이 교회에 관하여 던져주는 빛을 어둡게 했다. 알포드는 또한 장로들과 감독들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28절이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4) 로마 가톨릭 저자들 중 돌링거 같은 이가 그러하다

 

더 나아가 알포드는 빌립보서 1:1절에 대해서도 말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는 빌립보 교회의 일꾼들을 지체들과 함께 열거했다. 특히 지체들이 일꾼들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계급적인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주후 420년에 죽은 제롬은 디도서를 주해하면서 사도시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장로들이 곧 감독들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다툼이 발생하여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갖는 쪽으로 변해갔다"

 

바로잡는 힘

인간은 악의 치료책을 고안해낼 수 없다. 이는 성직권주의가 하나님 말씀의 원리들과 가르침을 대체한 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믿음을 크게 이탈한 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낸 체제는 불화의 악을 제거하지도 못한다. 이와 같은 악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심지어는 커다란 종교 집단에서도 그러하다. 외적으로는 하나인 듯 보인다 해도 말이다.

다양한 체제들로 이루어진 기독교계는 정해진 멸망을 향해 급속히 치닫고 있다. 또 우리는 성경이 성직자제도를 배격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우리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자. 또한 무언가를 고백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다름을 유의하도록 하자.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자.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을 다함은 고난 당함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서 성령님이 갖고 계신 영광과 권한 및 그분이 성경 안에 적어놓으신 원리들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