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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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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3. 14:20 횃불/ 2000년

무능한 인간과 전능한 하나님

한 봉 래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4-7)

 

사람과 동물의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기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아리는 알에서 깨자마자 어떤 먹이는 먹어도 되는지, 어떤 먹이는 먹으면 안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병아리는 어미 닭에게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물론 약간의 성장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기본적으로 동물들은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먹을 수 있다, 이것은 먹으면 안된다는 등의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초등학교 6, 중 ·고등학교 6, 그것도 모자라 대학을 4년을 다니고 대학원까지 배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직장에 들어가면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간 동안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가지 지식과 능력을 습득해서 능력 있는 사람에게 시편39편은 그가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알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소년이었을 때 물맷돌로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던 사람입니다. 양을 칠 수 있었고(당시의 중요한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수금을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또한 다윗은 자신의 일생을 손 넓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9:5). 다윗은 오래 살 것 같았고, 지금 젊어서 미래가 창창해 보여도, “내 생애는 이 손바닥 넓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이 손바닥만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셨을 때 어떻겠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람은 일생동안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삽니다. 움직이고, 어떤 일을 시도하기도, 성취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생애를 다윗은 그림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지만, 실체 없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끼고 끌어 모아서 재물을 쌓습니다. 고생하면서 재물을 쌓아놓았는데 그 재물을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가져갑니다. 첫 번째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 그 재물을 갖지만 전혀 감사치 않는 사람이 그 재물을 취하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어리석은 바보가 그 재물을 취합니다. 그 재물을 물려받은 아들은 미련한 자여서 그 재물을 지키지 못합니다. 마지막 경우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 재물을 취합니다. 이것이 인생이 평생 수고한 결과입니다.

시편 49 7-9절까지 말씀에도 사람의 연약함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49:7-9)

사람들이 연약하고 무능한데, 특별히 이 영역에서 더욱 무능합니다. , 자기의 영혼의 구원을 자기가 결코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영원히 산다 해도 못합니다. 그가 일평생 노력해서 못하면 그 다음에 또 태어나서 한다 해도 할 수 없으며, 그렇게 영원히 산다 해도 자기의 생명의 구원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이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9 3-12절 까지에서 결혼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9:3-12).

사람은 자라면서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갑니다. 어느 정도 능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결혼을 합니다. 우리의 경우라면 군대를 갔다 오고 직장을 잡게 되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한 다음에 어린아이를 키우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아이를 키우면서 돈을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위가 높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결혼, 아이, 재산, 지위가 인생의 중요한 네 영 역입니다.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사람은 자기가 연약한 존재, 무능력한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혼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은 이혼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다시 말해, 이혼이 불가능할진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혼하면 당연히 이혼하지 않고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혼은 극히 예외적인, 불행한 사람이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에서 주례자가 늘 그렇게 묻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겠느냐고. “라고 신랑과 신부가 대답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이혼이 없는 결혼은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과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산다는 것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혼인서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19:8).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죄인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의가 나을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래 원하시는 결혼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바리새인은 이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의 이혼 문제에 관한 논쟁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첫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사람이 이를 수 없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우리 가운데,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타고난 자가 있습니다. 이제 거듭난 자는 가능합니다. 이제 주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에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안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19:13-15)

아마 당대의 많은 어머니들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그 분에게서 축복 기도를 받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원가를, 좋은 것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유명한 랍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분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위해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겠습니까? 훌륭한 교육을 시켜주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어떤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너무 많이 오니까 제자들이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아이들을 용납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수해주셨습니다. 안수하신 예수님의 손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셨던 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도록 하셨던 그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아이들에게 천국을 주고 계셨습니다. 아무런 기적도, 아무런 외적인 증거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하늘 문을 열고 계셨습니다.

이 아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들 같이 큰 어른들이 아니고, 예의를 알고, 조용한 어른들이 아니고, 이 시끄러운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01.”

어떻게 사람이 늙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니고데모처럼 제자들도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커버렸는데,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동심을 결코 되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단순하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겸손함입니다. 그는 자기가 작고 연약한 자인 것을 압니다. 그는 자기가 돌봄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압니다. 그는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자기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이는 날마다 실수할 것입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자이다.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이다.” 이것을 아는 자가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단순한 신뢰로 예수님께 갈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신뢰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 이런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열어주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부()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19:19-22).

이 청년은 적극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단지 죄를 짓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계명을 제시하셨습니다. 계명을 지켰다고 하자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문제는 자기가 계명을 지켰다고 착각하는데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면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계명 중에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계명이 예수님께는 하나 더 있구나. 이 행위를 예수님은 원하시는구나. 그런데 나는 슬프게도 그 계명을 지킬 수가 없구나. 왜 예수님은 안 나와 있는 계명을 하나 더 요구하셨을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9:23-29)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부자이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뜻을 잘 이해했습니다. 즉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부자뿐만 아니라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가 사람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약에서도 부는 보호하는 것이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것이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지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부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다만 부자에게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 즉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26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19:2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결혼과, 아이와, 부와 지위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을 선언하기 위해서만 주님이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가능성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면 그는 부를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참된 신랑인 것을 알면 그는 참된 결혼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도 어린아이처럼 낮춰주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의 태도를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라고 한 말은 이중적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베드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다 버렸으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버렸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만약 이 말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버릴 수 있었다는 겸손한 고백이라면 그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수백배의 보상과 영원한 생명이 그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던 불가능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 있는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거듭났지만,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이 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이 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이혼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고,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문제로 예수님께 교훈을 받았습니다. 청년은 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세 경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움 받는 한 아내는 버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며, 사랑을 받아야 되는 존재이고, 부는 버려도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함께 있어봐야 귀찮기만 한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용납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부자이며 청년이며 관원이었던, 그래서 주님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할 수 있었던 부자 청년을 가게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5:27-32이 이혼 문제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5:27-32)

그 다음에 어린아이에 관한 대답으로는 마태복음 7:7에 나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7-l 2).

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태복음 6:25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5:28-33).

저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을 통해 저희 안에서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합니다. 참 기쁨과 평안가운데, 연약함이 있다 해도, 용납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000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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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