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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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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31. 12:05 횃불/ 2000년

요나의 표적

(믿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다루심)

한 봉 래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38-42)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과 증거를 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강력한, 심각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3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12:36,37).

예수님은 심판과 죄 용서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고, 그것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영원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말에는 타당한 면이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이 사람들이 이미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는 점 입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12:22).

그들은 귀신들리고 소경 되었고 병어리 된 사람을 고쳐 주신 놀라운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이분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않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9:18-26).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그 병이 나은 사건도 보았습니다. 또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내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을 경험하고도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여기서 보일 표적이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온 분임을 그들이 납득할 만한 기적을 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솟아나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그런 식으로 해결해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의 표적밖에는이라는 말씀은, ‘요나의 표적은 보여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요나의 표적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지어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있다가 나와 니느웨에 전도했습니다. 즉 요나처럼 예수님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18-22).

앞의 말씀과 상황은 다르지만,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이 요구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일 표적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헌 후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당시 46년간에 걸쳐 지어지고 있었던(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점까지도 계속해서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중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그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자기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중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4:23-25).

그 말씀대로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전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이자 증거와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에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이제는 내가 의인임을, 하나님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느니라”( 12:41,42).

솔로몬은 남방 여왕에게 아무런 기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을 보러 왔었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남방 여왕이 그 먼 곳에서 솔로몬을 보러 올만큼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의 전도는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남방여왕이 솔로몬에게 땅 끝에서 와 구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혜였습니다. 사람들이 연구하고 추구해서 알아낸 지식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하셨기 때문에 갖게 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우리는 표적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내 마음속에 있는지, 나는 그 진리에 대한 사모함으로 불타고 있는지, “하나님, 내가 이 지식을 갖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할 어떠한 표적도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만 듣고 회개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습니까? 그리고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외적 증거들을 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4:25).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다루심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1:17, 2:1-10).

요나는 자기 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죽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의 의가 깨어집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요나는 바다에 빠져 죽어가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택했던 죽음, 그 죽음을 이제 느끼게 됩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물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 실제로 바다 물이 요나의 머리에 엉키는 상황을 표현하면서 그는 물이 영혼까지 나를 둘렀다고 말합니다. 물써 내 코에, 내 입에 들어왔다고 하지 않고, 물이 내 영혼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뭔가 알지 못하는 깊음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나는 죽음을 각오했던 사람입니다. 죽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어보니까, 그 죽음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었고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죽으면 끝나리라. 죽으면 오히려 편하리라.” 그런데 죽어보니까 그 죽음은 자기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10:31)라고 표현되어 있듯이, 실제로 우리가 죽는 과정에 들어섰을 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거부했던 하나님의 손에 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 자체보다 (비록 그 죽음이 예상치 못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분리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는 죽음의 온전한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죽은 후의 형벌보다 더 큰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진정 괴로움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이 모든 원인은 그가 내려갔기때문입니다. 그는 다시스로 내려갔고 배 밑으로 내려갔으며 이제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고 있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바로 불순종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참된 진리에 대한 추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진정한 두려움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원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이번에는 땅이 나를 주장합니다. 땅이 나를 포위하고, ‘이제 너는 못 나간다. 여기까지 온 이상 너는 내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며 나를 막고 있습니다. 사망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누가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7:21-8:2).

요나의 경우 사망이 자기를 주장하는 경험, 이 사망의 세계에 류여 있는 경험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면 바로 로마서 7장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악을 참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가 선을 행하기를 그토록 원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악을 미워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죄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사망이 그 사람을 주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외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가 그 사람 내부의 의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그의 심령 깊은 곳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너의 삶은 죄 가운데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너는 생애가 끝나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는 승리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죄의 법,” “죽음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분의 사랑을 성령으로 받은 사람은 해방됩니다. 바로 이 해방이 복음입니다.

 

요나를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6).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짓고 사망은 그 죄인들을 주장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그러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요나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고, 죽음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불순종이 죽음의 원인이었으며,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분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를 사망이 장악합니다. “그러나바로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나하나님이 물고기를 통해서 요나의 생명을 보전해주셨습니다. 요나는 사망이 자기를 붙잡고 있는 그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왜 물고기를 보내서 저를 살리셨습니까? 저는 아직도 죽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 생각대로 여전히 죽어야 했습니다라고 계속 죽음을 고집하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마땅히 죽어야 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살려 놓으신 이 생명 가운데 거하며, 저를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이제 요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놀라운 생명과 사랑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2:9).

이제 나는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겠나이다. 이제 나는 나의 생각과 나의 의와 나 자신을 내려놓겠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전의 자신에 대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 즉 우상 숭배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우상을 숭배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5-27).

요나는 이스라엘(북왕국 10지파)을 부흥시킨 선지자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힘이 약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을 때 앗수르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이 약화된 앗수르가 다시 강력한 나라를 이를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약화되어 망해 버릴 것인가 하는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만에 성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전하라.” 이것은 하나님이 니느웨를 회복시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뜻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알고 요나는 도망칩니다. “내가 죽는다면, 내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는다면 니느웨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 하나 죽고 이스라엘이 살아남는다면 나는 기꺼이 죽겠노라····

요나는 그 생각이 우상숭배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해될 수 없는 뜻이라도 사람이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요나의 생각은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 이고 고귀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버려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너도 너의 목숨을 버리고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기 아들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사랑을 먼저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또한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내 생각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안 요나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안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우상을 숭배했나이다. “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시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나 생각, 방법 등등, 이런 것들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고백이 요나서 2:9에 나와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같은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나와야 합니다. 사람이 기여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2000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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