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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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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6. 19:45 말씀 안으로/영원한 안전

페터슨, 데이비드

히브리서 10장은 문맥을 무시하고 구원을 잃을 가능성을 가르치기 위해 해석되었다. 죄에 대한 희생물은 없는가? 불타는 심판? 이 본문에서 무엇 그리고 누가 위협을 받는가?

 

부름 받은 독자들

이 장에서 많은 세부사항들은 주어진 경고에 대해 진정한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가리킨다. 첫째, 저자는 경고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우리가 고의로 죄를 지으면”, 26절). 둘째 그들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았다”(26절). 디모데전서 2:4에 유사한 구절이 이것을 구원과 동일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했다(29절). 10절과 14절에서 “거룩하게 된” 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또한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된 독자들을 가리킨다. 넷째, 30절은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고 말한다. 다섯째, 그들이 “조명을 받은”(32절) 것은 개심 경험을 함축한다. 여섯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으로 박해를 견뎠다(32-34절). 일곱째, 저자가 34절에서 말하는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실체”가 “하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덟째, 35절은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19절은 저자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묘사되는 죄

저자는 신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어떤 죄를 묘사하고 있는가? 우리는 죄가 고의적임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은 무지에서 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계속되었다. 동사는 현재분사시제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그 죄가 부끄러운 것은 “일반적”으로 “언약의 피”를 수반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29절). 저자는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인 후 유대교로 돌아가는 죄에 대해(이전의 경고하는 구절에서처럼) 다시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돌아온 많은 혹은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의미 있는 결과 없이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저자는 그들이 얼마나 틀렸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 죄는 고의적이었으며 되돌아가려는 확실한 선택이었다. 돌아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들의 죄는 지속적이었으며; 그것은 유대교 안에서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희생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지키는 것을 포함했다. 29절은 그들의 죄가 수치스러웠다고 말한다. 죄를 위한 마지막 희생물로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던 신자들은 이제 그들의 행동으로 정반대의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성전 희생물에 참여함으로써 회심할 때 그들을 “거룩하게 한”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분명히 “일반적”이었어야 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그들에게 경고한다,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26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요일 1:7)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훌륭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이 동일한 장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들을 위한 마지막 희생물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했다(10,12,14절). 희생물의 체계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죄를 지은 신자 사이의 정결케 하는 근거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그 정결케 하는 기초가 그들이 지금 짓밟고 있는 희생물인데 어떻게 일상의 죄로부터 정결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사실, 만약 그들이 되돌아간다면 무서운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예상되는 심판

이 본문에서 신자의 구원의 상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종종 사용되는 “영원한”(히 5:9; 6:2; 9:12,14-15; 13:20) 단어가 이 책에서 심판과 관련하여 결코 발견되지 않으며, 또한 경고문에서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6장에서는 유대교로 되돌아간 한 가지 결과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할 것이 지적되었다(히 6:1). 여러가지 이유로 이 경고에 위협받는 심판은 육체적인 죽음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신약의 다른 구절은 언약의 피에 관한 학대를 정당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1:25-34이다. 고린도의 행동은 육체적 병과 죽음을 초래했다(30절). 두 번째, 28절은 모세의 법에 따라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왜 우리는 그것이 29절에서 언급된 영원한 죽음이라는 가정을 하는가? 처벌이 더 심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셋째, “삼키는”(29절) 불은 영원한 형벌보다 육체적인 형벌에 더 가깝다 이것이 곧 소멸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그것이 곧 펼쳐질 특정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데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죽음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많은 필자들이 믿는 이 서신의 날짜는 AD 70년보다 몇 년 전이다. 그 해에 미래의 로마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짧은 기간 내에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할 것이다(요세푸스에 따르면). 신약 시대 초기에 예언이 여전히 기능하고 있던 시대에 다가오는 이 재앙에 대한 어떤 언급이 히브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메시아께서 친히 그것을 예언하셨다(눅 19:41-44; 21:20-24).

 

서신 안에 이 다가오는 사건을 지적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 저자는 “그 날이 다가옴을”(25절) 보고 있다. 불길한 징조는 이미 독자들에게 보여졌다. 둘째, 오는 불은 “대적들”(27절)을 삼기 위한 것이었으며, 불신 민족에 대한 언급이다.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자신을 포함한 “우리”, 26절)과 대적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유대인 신자들이 성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단지 다가오는 죽음에 동참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그들은 예루살렘 도시와 다가오는 대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한 힌트인 “진영 밖”(13:13)으로 나가도록 권고 받았다. 만약 그들이 거기에 남아있다면 요세푸스에 의해 설명되는 “심한 징벌”(29절)이 있을 수 있다(굶주림,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녀를 먹는, 대량 십자가 처형 등).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파멸되기 전에 이 도시를 떠나라고 경고받은 것에 대해 쓴 것이 흥미롭다.

 

전달된 신뢰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이 그리스도께 충실할 것이라고 믿는다. 38절에서 “어떤 사람”이라는 단어는 원문에는 없다. 그는 두 개의 다른 문제를 암시하는(구원받거나 잃어버림)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집단에서 두 가지 다른 응답(신실 또는 신실치 않음)을 의미한다. 6:9에 나타낸 바와 같이 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는 분명하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느니라”(39절)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