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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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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에서 출발과 회복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 사건들은 우리의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으며 우리는 그들을 통해 주 예수님에 관한 소망, 훈계,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묵상에 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시내산에서 발생한 금송아지 사건을 둘러싼 상황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받기도 하지만, 또한 모세가 기록한 글들을 통해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분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움과 위로를 위한 격려의 기록도 얻게 됩니다.

 

그들이 떠난 배경에 눈에 띄는 것은 모세가 여호와와 소통하고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율법에 복종하는 언약을 맺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모세가 40일 동안 백성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4:12-18에서 우리는 신약 진리와 매우 연관된 적절한 예화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다시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백성들을 아래 남겨두고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이미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으며 이제 아론과 훌이 그의 부재시에 대리자로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은 주 예수님을 나타냅니다(그러나 백성들이 아론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므로 그 적용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만). 훌은 아론과 함께 아말렉을 둘러싼 사건들을 중재하는데 있어서 그의 지위를 다시 맡아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닮은 존재입니다.

 

이처럼 주님도 우리에게 충분한 자원을 남겨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열한 명의 제자에게 갈보리를 통해 하늘로 가는 여정을 준비하시면서, 그분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1] 주었고 또 다른 보혜사가 그들과 함께 거하고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임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의 왕좌를 향해 일하시는 변함없는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매우 동정하는 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님과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와 관련된 도전과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준비가 잘 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적절한 행동을 본보기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벗어났고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에 대한 기대가 우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2]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후 다시 이집트를 향해 되돌아갔습니다. 황소신 아피스(Apis)에서 차용한 이집트의 예배의 한 형태인 금송아지는[3] 그들의 이전 삶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사도행전 7:39에서 스데반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의 마음속으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아드님을 계속 기다렸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올라간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 여정의 가장 중요하고 악화되는 요인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실패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적인 반응이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지만, 백성들은 여호와를 대할 때 그 원칙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영웅들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되짚어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여정에 대한 기록에서 한 가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건넜지만(29), 30절에서는 여리고 정복으로 40년을 건너뛰고 나서야 믿음이 다시 언급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이 시련과 시험에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불순종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목적없이 방황한 것이 불신앙의 직접적인 결과였다고 말합니다.[4]

 

이집트를 향했던 불신앙의 마음이 가시적인 숭배의 대상을 찾으면서 그들은 일어나 우리를 위해 신들을 만들라라고 외쳤습니다. 잘못에 맞서야 할 책임이 있는 지도자인 아론은 이 죄에 대해 거룩한 증오를 보이는 모세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아론은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진영의 부도덕과 분열은 자연스럽게 뒤따랐고, 이는 우리에게 진리에서 교리적 오류로 이탈하는 것이 항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주님의 백성이 순수하고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모든 형태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여호와께 대한 헌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식을 통해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지만, 전체 장면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향락과 방종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배도행위를 현대 종교적 풍토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하면서 모든 모임과 의식을 예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 32:26-28에서 진영을 정결하게 하는데 필요한 징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분리된 사람들이 검을 사용하여 과오를 저지른 사람들을 회중에서 제거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예배의 관능적인 변태 속에서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버릴 것인가요? 울타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라는 질문에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검은 잘못된 교리와 그에 따른 부도덕을 바로잡는데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림입니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을 사용 하느냐에 따라 전체 진영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교리적 오류와 도덕적 일탈에 대한 징계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신약모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아래에서 모든 징계가 범죄자의 마음의 회복과 권리 회복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백성의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모세는 백성들을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다가오는 날에 하나님을 위한 많은 영광이 있을 성막이 지어지고 찬양이 드려지며 그분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실패는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오는 진리로 바로잡혀야 하고, 범죄자는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다루어져야 하며, 회복은 진보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위해 드려질 영광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신자들이 이집트로 돌아갔을지라도, 위로 올라가신 우리 주님께 계속 집중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합시다!

 

[1]   14:24

[2]  첫째 1:9-10; 요일 3:3

[3]  JP Lange, P. Schaff, & CM Mead, 거룩한 성경의 주석 2: 출애굽기와 레위기 (New York, NY: Charles Scribner's Sons, 1876), 132.

[4]   3:1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