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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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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가인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젊은이가 지역모임에서 교제에 대해 더 많이 찾고 싶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올 때 그는 아마도 “지역교회에서 교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교제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 1:9). 이것은 모든 신자를 포용하며 어떤 신자도 배제되지 않는 교제이다. 유다는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교제하는 구원” 또는 “우리가 나누는 구원”이다. 그러면 모든 신자들이 이 위대한 구원에 교제하거나 함께 나누는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교제이다.

그렇듯이 교제가 공통된 것들을 나누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역모임에서 교제하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젊은 신자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그는 사도행전 2:41-42의 모본을 따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누가복음 5:1-11 이야기에 나오는 “교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7절에서 “동료”라는 단어가 헬라어 “metevcw(메테코)”에서 유래한 반면 10절에서 “동료”라는 단어는 행 2:42, 고전 1:9, 빌 1:5; 2:1; 3:10, 요일 1:3,6,7 및 기타 여러 곳에서 “교제”로 번역된 “koinwniva(코이노니아)”라는 단어라고 지적한다(스트롱의 #s는 2841-44). 아마도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그들과 함께 이 구절에서 “동료 관계”를 공부할 때, 우리는 그들뿐만 아니라 지역모임에서 교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것이다. 아버지는 그가 수년 전에 집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감독자들이 “모임 생활의 특권과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보통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모임의 책임과 교제에 대한 보상이라는 제목 아래 이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구절을 묵상하고 반복해서 읽으면 그것이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먹여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동반자로서 세 가지에 감명을 받는다. 첫째, 제자들은 수고에 참여했다. 둘째, 그들은 시련에 참여했고, 세 번째는 승리에 참여했다. 이것이 교제에 관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

수고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동료됨은 은거하는 집이 아니다. 또한 휴가의 휴양지도 아니었다. 그들은 수고했고 “수고”로 번역된 이 단어는 피곤할 때까지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딤전 5:17에서 말씀과 가르침에 지칠 정도로 수고하는 장로들에 사용되고 있다. 목자로서의 헌신으로 인해 그들은 모임에서 일하는 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 세속적인 영역에서만 지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얼마나 큰가!

활동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물을 던지는 일에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씻는 일에 수고해야 했고, 마 4:21에서는 그것들을 고치는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의 은사에 기초한 다양한 봉사 영역을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을 상기시켜준다. 모두 상호 이익을 위해 주어진다. 은사들 중 하나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는 베드로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교제에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방향이 있다. 교제에서 모든 일이 성경에 따라 행해지는 것은 필수적이다. 단합 없이는 교제할 수 없으며, 이 단합은 사도의 교리에 기초해야 한다. 모든 행동에 대한 마지막 테스트는 “…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이다.

더욱이, 수고에는 종결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포기하지 않았고 해안으로 일찍 돌아올 수 없었다. 교제됨에는 헌신이 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우리 젊은이들은 모임에서 봉사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빠르게 배우고 있다. JFK의 말에 따르면 그는 모임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모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기꺼이 수고하겠는가?

시련

“… 그리고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동반자로 있을 때 우리는 시련에 참여하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무엇을 할까? 대답은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라는 표현을 열심히 기억하는 것이다. 낙담할 때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더 나아지게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단련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의 결과로 낙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6:9)라고 썼다. 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그래서 우리는 계속 씨를 뿌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의 젊은 신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라는 표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할 말씀에 근거해서 일관성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엄격하게 고수하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때때로 고투할 수 있다. 자신의 혼에서 태어난 확신만이 그를 보존할 것이다. 지역교회에서는 물고기의 가뭄에 대처하는 데 종종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가뭄을 이겨내야 할뿐만 아니라 밤새도록 수고했기 때문에 어둠에도 대처해야 했다. 우리는 “밤새 울음이 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임하리로다”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가?

이것이 동반자의 일부라는 것을 이 구절에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이러한 시련과 다른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은 우리의 성격과 확신의 진정한 척도이다.

승리

그들은 아주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이제 우리는 동반자로서 승리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료에게 손짓했다(metevcw(메테코))(5:7). 이 단어는 덜 친밀한 관계를 말하며, 그때 5:10에서 동료(koinwniva(코이노니아))에 사용되는 우리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 당시 7절에서 그들은 거리가 멀고 교제할 거리가 아니라서 “koinwniva(코이노니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가? 아니면 5:7에 나오는 사람들이 마가복음 1:20에 언급된 품꾼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을 때 세베대와 함께 섬기도록 남겨진 것인가? 우리는 품꾼들에 “koinwniva(코이노니아)”를 사용할 수 없었다. 동반자에서는 보상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동료들은 동반자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손짓했다는 것을 주목하라. 이 “도움”이라는 단어는 “sullambavnw(쉴람바노)”이고 “함께 붙잡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모임에서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왔다!” 그들이 온 것이 대단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붙잡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이것은 동반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붙잡고 있는가?

모든 집회와 관련하여 항상 “그들이 와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모임에서 “그들이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도회, 성경 공부, 주일학교, 방문에서 우리에 대해 “그들이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신자가 시련의 깊은 물을 통과할 때 “그들이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동반자의 표시이다.

젊은이는 질문을 가지고 왔다. 그는 성경에서 몇 가지 답을 찾았다. 지역교회의 교제 안에 있다는 것은 수고와 시련과 승리를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리로 우리 마음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