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로이드 가인

사도행전을 정기적으로 읽으면서 아들은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믿음에 순종하니라”(행 6:7)는 구절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의 상황에 자신을 두려고 한다. 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그가 묵상하면서 히브리서의 위대한 진리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을 지를 본다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더 이상 히브리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히브리인들에게 썼다”. 왜 그들은 믿음에 순종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시에 기록되지 않은 히브리서 10:1-18의 위대한 진리가 그들의 혼들에 밝아졌고 다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1. 그림자가 실체로 대체되었다.
2. 의식이 실재로 대체되었다.
3. 그림은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4. 죄를 덮는 것은 죄를 정결케함으로 대체되었다.
5. 매년 죄들의 기억이 죄들의 제거로 대체되었다.
6. 반복되는 희생물은 죄사함으로 대체되었다.
7.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물이 완전한 제물로 대체되었다.
8. 서 있는 많은 제사장들이 앉아있는 한 제사장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그들이 더 이상 실직이 없는 그들의 혼들에 침투하는 진리의 힘을 상상하려고 했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직업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바친 제물이 큰 희생제물로 바쳐진 것을 기뻐하면서도 그들의 혼합된 감정은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꼈을 때 그들을 대체한 언약 아래서 느꼈는가? 하지만 잠깐! 그 당시 누군가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는 히브리서 10:19-22의 말씀으로 표현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그들은 새로운 제사장의 씨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가까이 다가가자”. 아들은 그들의 생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얻었나니”-최근에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본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리고 '얻었나니' 뿐만 아니라 '들어갈 담대함을…' 그리고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초청을 얻었다!

그들은 여전히 ​​제사장이었는가? 그럴 수 있는가? 예! 그러나 이 새로운 제사장에 대한 다른 질서는 그들이 들어갈 때에 대한 제한이 없었고 그들이 말하는 것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담대함(parjrJhsiva(팔레시아), 즉 표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들이 제사장이라면 지금 무엇을 드릴까?”라고 크게 궁금해한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쳤다.

그 희생물은 영적이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 2:5). 영적 제사장은 제단에 올라오는데 이것은 옛 언약의 육체적 희생과 반대되는 영적 희생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영적 희생이 히브리서 13:15절에 설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이러한 영적 희생은 새로운 질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말한다. 그는 호세아 14:2를 회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 입술의 송아지로 보답하리이다.” 이 영적 희생의 진리는 시편 기자가 “오 주여, 주께 간청하오니 내 입의 자원 헌물들을 받으시고”(시 119:108)라고 썼을 때도 생각했다.

그들은 베드로서에서 구절을 계속 연구하면서 헬라어 본문에 여러 권위들을 파하고 “거룩한 제사장에 대한” 구절의 목적 조항을 본다. 그들은 지어지고 있는 이 집이 새로운 제사장의 기능과 이러한 희생물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럴 수 있지”, 아들은 묻는다, “그들이 예배를 위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요 15:16) 대부분 그들이 예배를 위해 구원받았을까?” 아버지는 제사장이 신자들의 집단 모임에 국한되지 않지만 신자가 제사장의 몸이라는 진리가 여기에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모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의 만찬에서의 예배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희생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이것은 또 다른 희생물인가, 아들은 궁금해한다. 이것이 사도행전 6:7의 다시 헌신하는 제사장들이 제단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적어도 구절의 표면을 긁으려고 노력하면서 궁금한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감동을 받는 희생물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부를 수 있는 영적 예배하는 제사장인가?” 영적인 제단에 다가가면서 그가 보여준 동정심 때문에 지적인 예배의 자발적인 행위로 제시하려는 희생물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온 몸과 혼과 영인가? 그는 책의 앞부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묵상에 감동을 받았는가? 기자는 열정적으로 간청했다. 그것은 제사장적 표현에 대한 탄원이다. 그 표현은 희생물에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순수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 표현은 영구적이어야 했는데 그것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제단 위에 있어야 했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자는 그것이 그들의 합리적인 섬김, 즉 마음과 관련된 봉사라고 말한다.

성도들과의 나눔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빌 4:18). 아들은 묵상을 촉발시킨 이 제사장들의 신분의 변화가 이 문제에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해한다. 그분의 일과 일꾼들, 그분의 전쟁과 그분의 전사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부분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놀랐을까? 예배 행위로만 설명될 수 있는 용어로 실제로 보였을까? 이러한 희생물은 복음의 지원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느니라.” 신자들의 이러한 선한 행위는 또한 제사장의 행위로 간주된다.

성도들의 간구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같이 놓이게 하시며 나의 손을 들어 올림이 저녁 희생물같이 놓이게 하소서”(시 141:2). 아버지가 이 구절로 넘어 가자 아들은 결코 제사장 될 수 없었던 왕 다윗을 그려 보려고 한다. 그는 레위인의 특권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 자신이 준비한 것과 분명히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을 바쳤다. 다윗은 저녁 희생물을 생각하고 그의 기도, 혼의 탄식, 그의 영의 감동, 그의 마음의 표현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똑같은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잠 15:8). 다윗은 자신이 살았던 언약을 넘어서고 있었을까? 아들은 궁금해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제사장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희생물은 육체적이기보다는 영적이며 하나님의 임재에 언제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제한이 없을 것이다.

부서진 영의 희생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다윗은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수소 번제를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교만도 없고 왜곡도 없는 영임을 깨달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그분께 드리는 제물로 보시는 현실을 깊이 생각한다.

구주의 미덕을 보여주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아들은 일반적인 제사장이 들어가는 대신에 나가는 제사장의 모습을 생각한다. 거룩한 제사장(벧전 2:5)은 아마도 아론의 모습을 본받을 것이다. 축복하기 위해 나가는 왕의 제사장직은 아마도 왕이기도 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패턴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가는 것일까? 거룩한 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분의 덕을 반영하는 능력은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묵상하는 우리 존재의 산물이 아닌가?

아들은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제사장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모든 신자가 이제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배, 헌신, 나눔, 주 예수님의 삶을 나타내는 교훈을 배운다. 오늘 나의 제사장직을 행사했는가?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