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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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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깁슨

이 구절은 갈보리에서 그분의 돌아가시기 전 주간에 매일 주셨던 주 예수님의 성전 사역(눅 19:45–21:38)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업 모두를 바친 이 이름 없는 가난한 과부를 주님께서 주목하신 두 가지 주요한 교훈이 있다.

 

위선의 악

바로 인접한 맥락은 가장 관련이 있다. 누가복음 20장의 끝부분에서 주 예수님은 특히 “온 백성이 듣는 가운데”(눅 20:45)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각 시대에 서기관들의 특징인 종교적 위선의 악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들의 삶의 일부는 독실하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원했다. 사회적인 영역에서 그들은 허세를 부리며 인사 받기를 원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회당에 모이거나 잔치에서 으뜸가는 자리를 원했고, 가식으로 긴 기도를 했다.

 

유대교의 이러한 종교적 통치자들의 행동에 특히 악한 것은 그들이 사회의 취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눅 20:47)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그 과부들을 약탈하지 않고 부양하는 책임을 져야 했다. 주님은 엄숙히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사악한 위선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영적 봉사의 모든 면에서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끊임없이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봉사의 동기를 평가하실 검토의 날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의미 심장하게 “위를 보시고”(눅 21:1) 그분께서 방금 책망하셨던 것에 대한 분명한 모본을 관찰하셨다. 마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단어가 추가된다. 그분은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막 12:41). 그 의미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헌금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그들이 연보궤에 돈을 쏟을 때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전 무게의 소리가 크게 들리게 했을 것이다. 주님은 앞서 이러한 위선 행위를 책망하셨다(마 6:1-2절). 가난한 과부 여인의 고요한 헌신과 순결한 마음은 이러한 신성한 체 하는 종교적 위선자들을 배경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주님께 바치는 헌신

주님께서는 특히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두 렙돈을 넣는 것”(눅 21:2)을 주목하셨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한 헌신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그녀의 두 렙돈을 드리는 소리가 분명 하늘에 메아리쳤다. “가난한”에 사용된 특정 단어는 이 과부가 자신의 노동력으로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일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그녀는 개인적으로 그 두 렙돈을 위해 노력했고, 그녀는 기꺼이 그 두 렙돈을 연보궤에 던졌다. 그녀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십일조를 훨씬 웃도는 한 렙돈은 넣고 하나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합리적으로 보관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물질적 자원을 주시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로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몫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그 자원을 헌신적인 행위로 그분에게 돌려줄 수 있고,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엾은 과부가 자신의 삶의 형편에 의해 하나님께 드리는 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부가 되어 현재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그녀는 또한 당시 이스라엘의 슬픈 영적 상태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종교적인 통치자들이 과부들을 대하는 부끄러운 방식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집에 있는 통치자들의 위선적인 행동 때문에 자신의 빈약한 자원을 숨기는 게 옳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드림은 그들의 영적 또는 도덕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집”(딤전 3:15)의 특징을 지닌 우리의 지역모임에서 드리는 것도 널리 행해지는 영적 상태에 관계없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과부가 드리는 것과 부자의 드리는 것을 대조적으로 더욱 전개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들은 다 풍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헌물로 넣었거니와 그 과부는 빈궁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가난한 과부가 그녀의 생활비 모두를 바친 것은 부자들의 모든 헌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여전히 연보궤에 기대어 앉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리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얼마만큼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고려하신다.

 

이 사심 없는 헌신적 드림의 척도는 마케도니아 교회의 신자들이 비슷하게 보여 준다(고후 8:2 참조). 이들이 사심 없이 드리는 근거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5) 것이었다. 우리의 주권자 주님은 우리가 구속의 기초 위에 그분께 속해 있음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은 갈보리에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며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러한 자원을 관리하고 섬기며 그것들은 우리 주님을 궁극적인 영광을 위해 사심 없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가난한 과부가 주님이 물질적인 방법으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녀의 생활비 전체를 바쳤다는 암시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빚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라고 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물질적 부가 하나님 앞에 놓인 영적 상태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복이 모두 영적이고 하늘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엡 1:3)에 있다. 물질적 자원을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릴수록 현물로 돌려 주신다는 가르침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물질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은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 이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쳤다(딤전 6:19). 우리는 지금 기꺼이 하나님께 바친다. 보상의 날은 여전히 미래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