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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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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여기서평화라는 단어가 사랑스러운 히브리어 샬롬(!/lv;, 7965)으로 구약에서 200번 이상 등장한다. 샬롬은 인사, 서두 인사말, 작별 인사로 사용되는 매우 다양한 단어이다. 비록 그것이 일반적으로평화로 표현되지만 완전한 정의에서는 번영, 평온, 복지, 건강 및 행복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다섯 번 불리고 있다( 15:33; 16:20; 4:9; 살전 5:23; 13:20). 그분만이 평화의 주님으로 불리고 있다(살후 3:16). 메시아는 화평의 왕( 7:2)이며, 여기서 사 9:6에서는 평화의 통치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음이 화평의 복음으로 알려져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0:15; 6:15), 그리고 그 전령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평화를 전파해야 한다는 것( 10:3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함(1:79).

 

평화는 전쟁과 불안의 세계 혼란 속에서 바람직하지만 찾기 힘든 일이었다. 국제적으로,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국내적으로, 개인적으로, 심지어 종교적으로든 사람들은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평화의 통치자를 거부했기 때문에 분열과 투쟁으로 남겨졌다. 평화의 통치자를 개인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만이 마음과 양심에 평화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그분은 마지막 날 저녁에 그분 자신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 사도의 말씀을 믿고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아마도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평화에 대한 이 이중 언급( 14:27)에는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이중적인 측면에 대한 제안이 있을 것이다. 양심에는 평화가 있고 주변 환경에도 평화가 있다. 모든 신자들은 로마서 5:1의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 구원 안에서 우리에 대한 모든 죄와 혐의가 제거됨에 따라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적대감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진심으로 노래한다.

 

내게 평화가 있고 강처럼 평온하다.
세상의 친구들이 결코 알지 못했던 평화.

(S. Cluff)

 

그러므로 이제는 정죄가 없으며 이 평화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다. 평화의 통치자는 우리의 주님이자 구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항상 즐길 수 없는 평화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이다(4:7; 3:15).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고 항상 선의에 맡기고 어떤 상황에서든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평화이다. 겟세마네의 슬픔 속에서 구주의 언어는 그러한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나의 평화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인가여기에 그분의 혼이심히 근심할 때도하나님의 뜻에 따른 완전한 평화가 여기에 있다(26:38; 14:34).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처한 상황에서도 동일한 평화를 원하신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그분이 오셨을 때나, 여기에 계실 때나, 그리고 떠나실 때도 평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분이 오셨을 때 천사들은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2:14). 평화의 통치자가 오셔서 땅에 평화를,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왔다.

 

그분이 여기에 계실 때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셨다. 열 두 해 동안 비참하게 허송세월을 하며 헛되게 의사의 도움을 구했고 치유를 위해 그분의 옷자락을 떨며 만졌던 가난한 여인에게 그분은 은혜롭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5:34; 8:48).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평판이 좋지 않던 또 다른 여인에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7:50)라고 연민으로 말할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실 때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그 사랑스러운 복을 다락방에 남겨 두셨고, 이미 인용된 바와 같이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14:27).

 

그러나 이사야 9:6의 맥락에서 평화의 통치자의 궁극적인 영광은 그분이 권세를 가지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 보이실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치자”(rc',8269, 사르) 칭호는 위엄이 넘친다. 그것은선장, 주지사, 통치자, 수호자,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이 통치하러 오실 때 될 것이다. 그분은 땅의 왕들의 왕이 될 것이다(1:5). 그는 사르 샬롬이 될 것이다. 수많은 하늘의 음성이이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11:15)라고 선포할 것이다.

그날에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다. 평화의 통치자는 영광의 왕으로 선포될 것이다( 24:7-10). 그분은 오래 전에 자신을 거부했던 도시에서 통치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그 문은 그분에게 열릴 것이고그가 또한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의 끝들까지 지배할 터인즉”( 72:8; 9:10). 그런 다음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통치에서 샬롬 의 완전한 의미인 평화가 온 땅에 스며들고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할 것이다( 72:19).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가지 치는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2:4; 4:3).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수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65:25). 오늘날 사람들이 무기와 무장의 비축 량으로 왕국의 힘을 측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의 힘은 거리에서 노는 소년 소녀의 안전으로 측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옳은 것인가! “그 도시의 거리에는 소년들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그것의 거리에서 놀리라”(8:5).

 

그때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85:10). 의가 다스리고 평화가 거할 것이며 에덴이 땅에서 그러한 행복과 번영과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의 대가는 결코 잊혀서는 안된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1:20) 만들기 위해서 평화의 통치자의 고통과 죽음이 필요했다. 그러나 평화의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에서 다시 데려 오셨고( 13:20), 이제 승천하신 그분은 권능과 영광으로 나타나실 그날을 기대하며 기다리신다.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기대해야 하는가(딤후 4:8).

 

오시리라, 오시리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님!
통치하심을 보는 기쁨,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고, 경배합니다!

(FR Haver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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