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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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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길리스

빌립보서 2장 1-8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본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하셨는가를 보았습니다. 오늘 오전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기도의 모본을 보았습니다. 이제 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시겠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시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가 나의 필요라고 하는 자세로,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의 필요가 나의 필요라는 점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모본입니다. 이 서신의 배경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어느 한 날 감옥에 있을 때 어떤 방문자가 사도 바울을 방문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그 방에 에버브로디도가 왔기 때문에 굉장히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먼 빌립보에서 로마 감옥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성경 지도를 보았습니다. 비행기로 직선으로 날아가도 1천km가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마 다른 경로로 간다면 2천km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차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차가 없었을 겁니다. 말을 타고 갔을까요? 아마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걸어서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가 너무 지친 나머지 로마에 다다랐을 때 병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2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보시면 30절에 보면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먼 거리를 걸어갔습니다. 모임이 가진 선물을 바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바울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피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립보 모임은 바울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빌립보 모임의 영적인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가 일부 모임이 놓아지는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16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부 성도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제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 성도들이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감옥 생활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일부 성도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자 에바브로디도를 파송을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대로 사도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성도들의 근황이 어떤지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에바브로디도에게 바울이 물었습니다. 자매님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사도 바울이 물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어떻게 지내는지 문안을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말하기를 그 자매끼리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말했습니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떤 성도들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해야합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나쁘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울이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립보 모임의 성도들 간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을 바울이 봤기 때문에 바울이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듣고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합쳐서 복음에 진력하라고 1장에서 바울은 기술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확신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한 3장에서 경고했습니다. 거짓된 유대인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들어오는 것을 경고하며 이것은 나쁜 환경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걸어간 걸음과는 다른 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에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러한 씨가 떨어지는 일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4장에서는 바울에게 보낸 선물에 대해서 바울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한 번 이상의 선물을 빌립보 성도들이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적인 표현들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재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감사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의 제사처럼 느꼈습니다. 또한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에게도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로마로 와서 그리고 바울의 소식을 들고 빌립보에 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빌립보 성도들 앞에서 공적으로 바울의 수신을 낭독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빌립보 성도가 다 모인 자리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가 여기저기 양쪽에 앉아 있습니다. 2장을 읽을 때 너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문장이 나오고, 그 본체가 하나님의 본체인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문장을 읽고, 자기를 낮추어서 자기를 비었다고 하는 문장을 읽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하는 문장을 읽고,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하는 문장을 읽고, 사람과 같이 있다고 하는 표현을 표현하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표현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는 문장이 낭독이 됐을 것입니다. 그 죽음조차도 십자가에 죽으심이니라고 하는 데까지 낭독했을 것입니다.

 

에바브라 디도가 읽었을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는 이 표현을 들었을 것입니다. 2장에 바울의 서신이 낭독되었을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님은 두 분 다 얼굴에 눈물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부터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상태가 되어 같이 협력을 했을 것입니다.

모임에서 서로 사이가 나빠지는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다른 인격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격이 까다로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파차간에 화목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이런 위험들을 간파했습니다. 이 두 자매는 서로 말도 안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좋은 자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거기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좋은 성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는 그러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가 빌립보 모임 내에서 서로 갈라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믿는 사람 일부가 어떤 쪽으로 편들었을 겁니다.

이것을 이제 극화라고 하는데 양극화라는 의미로 설명하겠습니다.

빌립보 모임 내에서 두 자매가 편을 갈라서 한쪽은 유오디아 자매가 옳다고 하고 어떤 자매들은 순두게 자매가 옳다고 하는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작은 편이 점점점점 커졌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모임 전체가 둘로 쪼개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형제자매들은 서로 간에 비방을 했습니다.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가지 본을 보겠습니다.

2장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것을 바울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바울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도 말하면서 계속 격려하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 가운데 교재 가운데서 부드러운 은혜의 마음을 계속 나타내기를 바울이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보여준 영적인 감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 자매의 사이가 바울에게 전해졌을 때 바울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이 기뻐는 했지만 그 기쁨이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 때문에 충만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슬픔과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충만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바울의 기쁨을 충만케 하겠습니까? 피차간에 서로 권면함으로 바울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2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즉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낮출 것을 권면합니다.

4절에서는 피차간의 돌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서 알듯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뭔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뿐 아니라 감정적인 필요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은 때때로 심리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것들을 어떤 것들을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바울이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 다른 견해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3장에 적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가지듯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적그리스도라 하는 사람도 있고 땅에서 나오는 양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게 확실한지 단정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과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옳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고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성경에 함께 동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에 동의를 해야 합니다. 구원과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동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침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같아야 합니다. 모임의 진리에 대해서도 뜻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서는 다른 차이의 여지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머리에 너울에 대해서 형제님들의 머리에 모자를 쓰거나 너울을 쓰지 않는 일에 대해서, 자매님들이 너울을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개인의 의견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 마음을 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일방 통행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쌍방통행입니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은 일방 통행의 사랑이 아니라 쌍방통행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뜻을 합하여” 다른 말로 하면 “같은 영혼의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음을 품어” 즉 “생각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3절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다툼은 경쟁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서는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어떤 형제님이 은사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거나 인도하면 쉬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경쟁은 그 사람의 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자기가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경쟁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코 발견돼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말고, 말고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입니다. 허영으로 서로 경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경쟁과 반대되는 편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대로 낮아지는 것이며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을 나 자신보다 더 좋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좋게 평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본문의 4절에서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이익이 어떨지를 염두에 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먼저 챙깁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고 다른 사람은 나중이라’고 하는 표현들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임의 성도들 사이에서는 이런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님들은 피차 간에 다른 성도에게 무엇이 유익할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5절에서 권면하기를 겸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 오시기 이전에 신성을 가진 존재에서 가진 소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보좌를 함께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엄위와 영광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과 교재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몸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살펴보셨습니다. 죄인들이 불행한 가운데 존재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 받기에 합당한 상태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죄인들을 돌아볼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아버지 하나님과 공유했던 그 보좌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바울은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식물원에 몇 번 가봤습니다. 많은 종류들의 꽃들이 피어 있는 걸 제가 봤습니다. 수백 개의 꽃들이 피어 있는 걸 봤습니다. 그것을 누가 디자인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꽃들을 보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어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움의 전체를 어디에서 발견하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마음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그분 자신을 나를 위해서 주신 것을 내가 볼 때, 보좌에서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그것도 십자가까지 가신 것을 내가 볼 때, 이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죄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셔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라고 권면한 이유인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영어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본체를 갖고 계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6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마음을 낮추셨습니다.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신성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구유에 뉘었습니다. 목자들이 와서 후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아기를 볼 때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모습을 목자들이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독생자는 그 자신을 비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보좌에서 이 땅으로 자기를 비워 내려오셨습니다. 주의할 점은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신성에 손상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필적(匹敵)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보통 사람처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사람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이 형체라는 말은 어떤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그리스 말로 모르페라는 말인데 어떤 것들에 핵심이며 정제된 그 근본 알갱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이라고 하는 그 성질의 핵심 중에 핵심인 정제에 해당하는 것을 본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러한 본체는 모르페라는 그리스어를 가지고 있으며, 바울은 7절에서 종의 형체라고 할 때 이 형체도 바로 하나로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 되는 의미의 본체가 사람이 됐을 때도 종의 형체라는 말로 동일한 모르페라는 그리스어를 썼습니다. 완전한 사람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가져야 될 근본을 갖고 계시면서 사람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숨기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섬김을 받는 게 아니라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사람으로서 종의 모습을 띄었습니다. 천사장들은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와 같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손님을 집에 초대할 때 주인은 첫 번째로 손님을 맞이할 겁니다. 그리고 그 집의 종들이 주인이 초대한 그 손님의 발을 시킬 것입니다. 또 다른 종은 그 주인이 초청한 손님 머리에 기름을 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기 전에 어떤 집에 2층에 가신 것을 여러분 아실 겁니다. 그의 유월절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물을 닫는 대야가 있었고 물이 있었고 수건이 있었습니다. 12제자가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그 물에서 발을 씻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나는 안 씻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발을 씻기는 일을 내가 취하지 않겠다고, 나는 종이 아니니까’라는 생각을 제자들이 가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들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대야에 물을 붓고 말이죠. 그것으로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에게까지 왔습니다. 내 발을 절대 시키지 못하십니다. 당신이 내 발을 시키는 것을 나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내 발뿐 아니라 몸도 씻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욕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일어나셔서 겉옷을 다시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한 모본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다른 말로 하면 낮아져서 다른 성도를 섬길 준비를 하라는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높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그것도 낮아진 가운데 사람들처럼 행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아지셨습니까? 순종하는 데까지 말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순종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순종하지 않는데 순종하는 걸 배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순종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운 그 배움은 그 순종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배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고난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어떤 값이 지불되어야 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0장에서는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등을 보이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를 치는 자에게 내 등을 피하지 않고 라는 표현이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내 수염을 뽑을 때에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게 침을 뱉는 자에게 내가 내 낯을 돌리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순종하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성경은 복종이라고 했습니다. 어디까지 순종의 복종을 했는가 하니 죽기까지라고 바울은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추가하여 표현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죽음입니까? 이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무시무시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로마인들은 당하지 않는 죽음이며 로마 국적이 없는 야만인들이 당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어떤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도 십자가의 처형을 받아서는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곧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나가셨습니다.

위험의 보호자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통중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기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가 갖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웃으라. 그것은 내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최형제님이 2장에서 디모데와 에버브로디도의 본을 교제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20절에서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모본의 하나입니다. 디모데는 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성도였습니다. 21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저희가 라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디모데는 젊었지만 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찾아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에바브로디도의 본이 나옵니다. 우리는 에바브로디도 마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먼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을 돌보려고 로마까지 왔습니다. 거의 병들어 죽게 될 정도로 약해지기까지 말입니다. 2장에서 잊지 말아야 될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모본의 세번째 사람입니다. 17절에서 말하기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여기에 관제라는 말은 쏟아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레위기에 나오는 관제를 떠올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번제를 먼저 떠올리고 번제는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 전체를 번제로 생각했습니다. 번제는 관제가 없으면 완성이 되지 않습니다. 포도주에 관제가 없으면 번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관제가 바로 나다’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번제 같은 빌립보 성도들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섬김에 대해서 바울이 관제 같이 부어져서 완성되는 것을 내가 깊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서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세 번을 제시하셨습니다.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차간에 도우셨습니다. 서로 간에 관계에 있어서 우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마음의 특성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낮아져서 그리고 나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을 보면서 제 마음이 감동을 했습니다.

슬리퍼에다가 고맙게도 제 이름과 자매 이름을 써 놓고 준비해서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5월 5일 – 2  강서모임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