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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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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길리스

베드로전서 5장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2장 18-25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기도의 모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에서 겸손함 가운데 피차 간에 돌보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으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쓸 때 바벨론에서 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느 날 하신 말씀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회복을 시키실 때에 네가 회개한 후에 형제들을 돌보라고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부인한 다음에 회복한 이후에 말입니다.

“네가 회개한 이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라고 권면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핍박받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베드로전서를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가 있던 베드로가 고난받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부터 믿는 유대인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베드로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힘 있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베드로 서신을 집필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세 단어가 반복해서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말이 16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이란 단어가 12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라는 말이 10번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단어 사이 사이를 지금 베드로가 쓰고 있습니다.

영광으로 부름을 받은 가운데 지금은 고난 가운데 통과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우리의 하나님을 지칭했습니다. 5장 10절에서 베드로는 다시 언급하기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그리고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니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들어가면 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삶 가운데 어려움을 통과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은혜의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하늘에 도달하기까지 충분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은혜의 하나님을 세 가지 측면에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하는 분입니다. 고난을 여러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할 때 그 은혜는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우리의 공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의미의 그 구원하는 은혜를 말입니다. 이 자리에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않으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회복되는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족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실족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베드로가 만났을 때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회복이 됐습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것은 한 번 실족했던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바벨론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마가도 한 번 실패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젊은 성도인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의 또 다른 이름이 요한입니다.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어느 한 때 무슨 이유로 이 마가는 그 전도 여행에서 이탈했습니다. 집으로 고향으로 그만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는 힘을 잃었습니다. 아마 그 여행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그래서 그의 외삼촌인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등졌습니다.

 

결국에는 이 마가는 회복이 되었고, 바울이 서신을 쓸 때 나중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내게 유익하니라”라고 회복된 마가를 지칭했습니다. 그 회복된 마가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다시는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혹시 실족한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계속 하나님과 놀라운 복된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일들이 생길지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실족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회개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죄를 고백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의 잘못된 행위를 버린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도록 여러분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그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구원하시는 은혜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회복시키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보내시는 은혜를 베드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인데 베드로는 그러한 섬김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많은 경험을 한 성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혜를 쓰도록 그 품성이 함양이 됐습니다.

 

핍박으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려고 베드로는 베드로 서신을 썼습니다. 특히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특히 고용돼서 종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격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용돼 있는 종들인 사환들에 대한 격려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종들은 그 주인들에게 두려워함으로 순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주인들은 전제적인 그런 주인으로 보입니다. 즉 부드러운 주인이 아니라 엄한 주인으로 보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주인들을 존경하라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주인들을 섬길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그 주인들을 정말로 떨면서 섬긴다면,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주인을 섬기는 게 아니라 주인을 두려워함으로 주인을 섬긴다면 말입니다. 그러한 섬김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엄한 주인을 섬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들은 고용주일 것이고 어떤 분들은 피고용자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피고용자들은 고용주를 존경해야 합니다. 이 존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오는 종입니다.

 

베드로는 18절에서 말하기를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용주들은 대단히 선하고 그 고용주와 함께 하기가 쉽습니다. 아주 선하고 친절한 고용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점잖은 고용주가 있습니다. 점잖다는 말은 참고 그리고 잘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쉽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와 같이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까다롭다는 말은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을 말합니다. 때로는 불의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조건이 어떠하든 말입니다. 언제나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그 결점을 발견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고용주를 여러분이 만난다면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어떤 다른 직업을 직장을 그만두고 찾아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반응하면 지혜로운 반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어떤 경우는 고용되어 있는 분이 고용주로부터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이 그리스도인 피고용자는 그것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런 사유로 해서 고용주가 피고용자인 그리스도인을 까다롭게 어렵게 아마 대응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진급을 시키지 않는 것 같은 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21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라고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올바르지 않은 그러한 조치를 통한 고난을 받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섯 번이나 우리의 부르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 15절에서 부르심이 나오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세의 거룩한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여러분은 그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부르심이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장 9절에서 또 한 번의 부름이 있는데 중간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라고 하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부름받았고 이번에는 어두운 데서 불러낸 부르심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장 9절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름을 받은 부름은 어떤 해를 당하면 거기에 대해서 보복하는 행위를 하지 말고 이 말씀처럼 도리어 복을 빌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장 10절에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이 들어가게 하시니라”고 하는 부르심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2장 21절에서는 부당한 고난을 받되 그것을 참도록 권장하는 권면이 나와 있습니다. 선을 위해서 함에도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속 그런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고용주가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그런 일을 계속할 때 말입니다. 정직하고 그리고 신뢰할 만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은 반응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계신 모두는 직장에서 정직하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고용주가 피고용자들을 신뢰하게 되면 좋은 것입니다. 직장에 출근할 때 늦지 않습니다. 지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는 그 일을 맡은 일에서 벗어나는 그런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고용주가 산 비품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그런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정직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대접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 보시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어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받은 고난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우리의 경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쁘게 했음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잘못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가리고 조롱했음을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네가 선지자가 아니냐?” 그리고 쳤습니다. 선지자여 누가 너를 때렸느냐 맞춰보라는 식으로 조롱한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예수님의 몸에 많은 가격을 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뺨을 때린다면,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군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제 얼굴에 어떤 사람도 침을 뱉은 적이 없고 저는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내 얼굴에 침을 받으면 제가 보복을 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참으셨을뿐 아니라 그 사람들에 대해서 위협하지 않았고,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뜻대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계속 오랫동안 사람처럼 생활하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양같이 끌려가시면서도 아무 말을 안 하시고 참으셨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모습은 여기 있는 말씀대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본을 끼쳐”

이 고난은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해서 우리의 것으로 가지라는 의미의 고난이며 예수님이 고난을 받았으니까 그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복사해서 우리의 고난으로 가지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학생일 때에 글을 쓰는 필기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나에게 종이를 주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위에다가 먼저 받아 적을 글자를 썼습니다. 우리 알파벳에서 26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abcd … z까지 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글자 위에다가 복사 즉 베껴서 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쓴 그 글자를 따라서 베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서 본을” 할 때 마치 선생님이 쓴 글자 위에 베껴 쓰듯이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베껴서 그대로 삶에 적용하려는 의미입니다. “따라오게”라고 했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뒤를 따라갑니다. 마치 글자를 베낀다면 글자를 쓴 길을 따라 베껴서 가듯이 말입니다. 글자를 베길 때 앞에 쓴 글자 모양을 성실하게 따라가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따라간 자취를 성실하게 있는 그대로 따라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가 걸어간 그 본의 길을 세밀하게 따라가면서 베끼는 삶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음직하다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완전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고난을 가하는 사람에게 나쁜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말을 가지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때린다면 내가 다시 맞대응하며 때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대접을 받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복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고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리 예비됐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크신 섬기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크신 대제사장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고난을 참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잘못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면서 고난받는 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권고를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롭게 그것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참으신 것은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본으로 받아들이도록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고난의 측면을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한 고난의 측면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로 인한 경험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겠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했다고 하면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더 이상 죄와의 관계를 끝내는 의미로서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특성이 죄의 것들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실제 생활에서의 올바름에 관한 의에 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심같이 이것은 잘못된 대접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잘못 대하면 바로 복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는 또 하나의 측면에서 이제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할 때 바로 복수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본을 보이고 우리는 옛날 죄들을 이미 끝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제 제가 우리의 마음에 노크를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의는 신분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올바름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의롭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록 장부에 그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분적인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실제적인 올바른 삶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4절의 말씀처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은 신분적인 의뿐 아니라 실제적인 올바르게 사는 삶의 본을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고 말하며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헤매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목자를 따라 갑니다. 이 목자는 우리의 영혼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분은 큰 감독자이십니다. 지속적으로 양무리를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사무실이든 공장이든 여러분이 일하는 어느 곳이든 이 대목자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못된 대접을 받을 때에도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의 본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아주 세밀하고 주의 깊게 그분의 발자취를 베끼듯이 따라가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보스가 사장님이 여러분을 만약에 보복을 한다면 나쁘게 그분들에게 대항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사장이 여러분을 때리더라도 말입니다. 발로 차도 말입니다.

우리는 복수하지 않습니다.

배가 아파 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5. 6 – 1  강서모임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