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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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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길리스

로마서 14장 - 15장 7절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5장 1-7절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전 시간에는 불의한 대접에 대한 믿는 자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오후 이 시간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고자 합니다.

15장 2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다음에 위대하신 모본인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15장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권면했습니다.

더 이어 나가기를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하는 데까지 권면을 했습니다.

이 이후에 이러한 모본들을 계속 보겠습니다.

로마에 있는 모임은 큰 모임이었습니다. 아마 로마 시의 많은 수의 모임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에 있는 모임들에는 많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회적인 배경과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의 습관을 좇아가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영접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아시지만 유대인의 풍습에는 어떤 음식들은 먹지 말아야 되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든지, 어떤 경우에는 조개를 먹지 않는다든지, 여러분은 유대인이 아니니까 조개를 먹어도 됩니다. 어떤 경우는 1년 중에 날들을 중히 여기는 날들이 유대인에게는 있습니다. 그 날 중에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어쩌면 여호와의 일곱 절기에 관한 풍습의 습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구원받아 들어오는 사람이 그러한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풍습의 절기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을 마음속에 느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구원받기 전에 우상을 섬기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영접이 됐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음식에 관한 금지되는 것들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뭐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 년 중에 어떤 날을 특별히 지킨다고 하는 것들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로마 안에서 한 모임으로 이러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모임의 위험성을 느꼈습니다. 두 종류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바울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14장 1절에서는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5장 1절에서는 “우리 강한 자가”라는 표현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데 양심적으로 제약을 받는 성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성도들은 어떤 날들에 구애(拘礙)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려야 되는데 아직은 누리지 못하는 이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강한 자라는 성도들은 뭐든지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뭘 먹든지 간에 말입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의식적인 종교적인 규율에 구애되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이 두 무리 가운데 위험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위험 중에 하나는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얕보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3절에서 말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업신여기는 태도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 다음 말씀에 나와 있듯이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비판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을 판단하지 말라”라고 바울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냐하면 말씀대로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믿음이 강한 자가 자유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세 번째는 그 세우는 권능이 하나님 곧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위험이 존재했습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길 위험이 있고 약한 자의 위험은 강한 자를 판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양쪽 태도가 다 잘못됐습니다. 만약에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부인되는 사람이 믿음이 약한 자 앞에 나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서 약한 자 앞에 돼지고기를 내놓습니다. 이 강한 자의 형제님과 자매님은 약한 성도에 대해서 동정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그리스도인인데 자유함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먹는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위험은 이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긴 먹되 믿음으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면서 그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 양심은 말하기를 ‘이 음식을 부정하다’라고 하는 양심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초청한 강한 형제님을 고려해서 그만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믿음이 없이 먹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14장 23절을 보십시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강한 형제님은 약한 형제님에게 이 일을 유발시켰으니까 잘못한 겁니다. 15절에 보면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그랬듯이 이 형제의 믿음을 망하게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서 조차도 형제 자매님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이 문제는 도덕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들은 다른 형제자매들을 망케 하는, 다른 말로 하면 실족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이 태도 때문에 만약에 어떤 일들이 다른 형제 자매들을 실족시키게 한다면 나는 그 형제를 망케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어떻게 풀겠습니까?

첫 번째 바울은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6절부터 12절까지에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6절에서는 첫 번째 주제 즉 첫 번째 중요성과 원칙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공통의 목표를 갖는 것을 제시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라고 하는 공통된 목표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원칙이 하나님께 공통된 것을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말입니다.

두 번째 원칙을 7절에서 9절까지 제시하며 같은 주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7절에서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죽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의지나 자유 의지가 아니라 주님께 의탁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주님에게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주님에게 의존돼 있습니다. 사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 의존돼 있고 죽는 것조차도 주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죽을 때에도 죽는 시기를, 죽는 순간을, 주님이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원칙은 다른 성도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대원칙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이 주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보다 더 크지 않다고 하는 태도를 말입니다. 이 두 차이를 우리는 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가 믿음이 강한 성도를 보면서 저 성도님이 자유를 가지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라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진 분은 믿음이 약한 분이 음식을 가리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더라 하고 인정을 해주는 첫 번째는 같은 목표를 갖는 겁니다. 주님을 높인다고 하는 같은 목표를 말입니다.

두 번째 양쪽 다 같은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같이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0절부터 1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세 번째 원칙입니다. 10절에서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에 대한 말입니다. 그 다음에 믿음이 강한 형제님을 향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라고 다시 한 번 되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피차간에 비방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성도들은 이미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던 심판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강한 형제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강한 형제님을 판단하는 심판 자리에 앉은 것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이 약한 자에게 말하기를 그런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되고 머지않아 믿음이 약한 그 형제님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말하기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여기에서 멈추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해서 조금 부연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미 8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정죄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말을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정죄는 끝났습니다. 즉 심판은 끝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우리가 천국가고 지옥가는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는 믿는 사람만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몸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마치 장부를 정리하듯이 주님 앞에 상급에 관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상급을 잃을 수도 있는 심판대입니다.

이 14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형제 자매님들을 우리가 각각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차 간의 관계에 있어서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죄를 범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물으며 심문할 때 답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답을 못한다면 우리는 상급을 잃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관한 언급을 합니다. 지역 교회 안에서 섬김에 관한 문제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심판들을 말합니다. 나의 섬김이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에서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지역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두 질이라는 재질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첫 번째 재질은 금은 보석이라는 재질이고, 두 번째는 나무나 집이나 풀이라고 하는 재질이 있음을 바울은 제시합니다. 금은 보석이라는 재질은 지역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값이 나가는 재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바울은 가르침의 말씀을 말합니다. 만약에 진리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지역 모임 안에서 금은 보석일 것입니다.

그 재질이 만약에 이 문맥에 어긋나게 진리가 아닌 것들을 지역 모임 안에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짚이나 나무나 풀이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불로 그 섬김의 재질이 무엇인지 시험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만약 불이라고 하는 시험을 통과할 때 금은 보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시험을 통과한 다음에 금은 보석은 아무 변화가 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짚이나 나무나 풀은 불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타서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남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 섬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형제 자매님들을 대했는가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드러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내가 주님 앞에서 지역 모임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대해서 내가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서 4장에서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심판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서 3장에서는 내가 무슨 재료로 지역 모임을 섬겼느냐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면 4장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교회인 지역 교회를 섬기되 무슨 동기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는지에 대한 심판이 기록돼 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바울이 말을 했겠습니까?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 모임을 섬기는 동기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오시기까지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감추었던 모든 것이 드러나리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때 마음에 있는 생각과 뜻이 다 드러날 것이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한국에 온 동기를 모를 것입니다. 형제님이 저를 한국에 와 달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여보, 서울을 관광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식물을 구경할 좋은 기회가 왔어요. 한국 여기저기를 구경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잘못된 동기를 가진 것입니다. 제가 순전한 동기인지를 제가 살펴봐야 합니다. 제가 여기 온 동기는 여러분들을 돕고 모임들을 돕고자 하는 동기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의 심판대에서 이러한 동기를 그리스도께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께 무슨 동기로 모임에서 성도들을 섬겼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하는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차피 구원받았으니까 어떻게 살든 나는 하늘을 간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하늘나라에 주님 앞으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가서 이 땅에서 여러분이 다투었던 경쟁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휴거 이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휴거시키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모인 교회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대 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각자가 그리스도 앞에 대답할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피할 데가 없습니다. 바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각각이라고…

여러분이 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고 제가 여러분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서 내가 다른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한 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섬긴 그 섬김의 질에 대해서 그리스도 앞에 답을 해야 합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내가 무슨 동기로 섬겼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10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간에 말입니다. 좋든 나쁘든, 선이든 악이든 간에, 선악간에라고 하는 선이라는 말을 바울이 쓰면서 대단히 흥미로운 그리스 말로 ajgaqov"(아가토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의미로서의 그리스 말로 아카토스라는 단어를 바울이 골랐습니다. 만약에 내가 몸으로 아가토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대로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친다면 그것은 선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해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선악간의 악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결과의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악이라고 하는 나쁜 것이 내 몸을 매개로 해서 내 몸이 매칭이 돼서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상급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앞에 서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3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같은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주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의 것이라고 하는 두 번째 원칙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같은 청산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서 13-23절 마지막 절까지에서는 7가지 권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첫 번째는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생각하는데 이 말씀은 분명히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 대한 역량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는 15절입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만약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어떤 그리스도인을 망케 할 수 있습니다. 망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 말은 어떤 성도와 어떤 성도의 구원을 잃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길에서 다른 길로 빗나가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유익하게 쓰임 받아야 할 그 성도를 유익하게 쓰임받지 못하도록 다른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이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비해서는 굉장히 차이가 나는 가치의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평강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영역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참된 성격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격조가 높고 높은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리고 하나님의 옳음이 먹는 것 마시는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8절까지 해서 하나님의 의를 말했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를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 하나님의 의를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를 설명한 장들입니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다루는 장이었습니다. 10장은 이스라엘의 현재를 다루는 장이었습니다.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의 장례를 미래를 다루는 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면에서 모든 사람을 다루는 데에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은 의롭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됐기 때문에 우리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바울은 이 평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평안만 다루는 게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분열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바울이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19절에서 말하기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덕을 세우는 일을 평강 평화 즉 화평 다음에 함께 말했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덕을 세우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우는 게 반대되는 것은 부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무너지게 말라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덕성을 무너뜨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인 형제 자매들을 내가 세울 것인가 그것을 무너뜨릴 것인가 둘 중에 하나에 놓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분은 강한 성도입니다. 만약에 강한 성도라면 먹고 마시는 일에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약한 성도 앞에서 말입니다. 강한 믿음이 강한 성도가 먹고 말씀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이 로마 시대를 생각하면 여러분이 만약에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먹는 것하고 다른 연약한 성도가 없는 자리에서 먹는 것하고, 만약에 믿음에 연약한 성도를 초청한 가운데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만약에 그 앞에 놓인 고기를 먹는 먹음에 있어서 거기에 만약에 다른 아무 고기가 없고 약한 성도가 초청했는데 돼지고기를 제시했는데 다른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상태에서, 15-17절에서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유익하게 할 것인가에 관한 해답이 15절에서 17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15장 1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 강한 자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에서 말하기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모본을 제시했습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9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이 올 때 그 핍박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과 아버지의 말씀을 가르칠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많은 일들 중에 먼저 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먼저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실 때 아버지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자의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일을 행할 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비방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에게 실제 물리적으로 때리기도 하고 핍박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람들이 이렇게 싫어했을까요? 왜 이러한 비방이 예수님에게 임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사려고 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믿는 성도님들은 덕을 세우는 것이지 그 덕을 무너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갈 것이고 거기에 가게 됩니다. 형제님들에게는 그렇게 그 앞에 간다는 걸 생각하고 하십시오. 성도님들의 선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님들이 덕세움을 입어 자라도록 가르침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2023.5. 6 – 2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