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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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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길리스

에베소서 5장 21-33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며칠동안 우리가 전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되심에 대해서 살펴본 것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모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모본과 돌보심의 모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오래 참으심으로 고난을 당하시는 모본을 보았습니다. 또한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을 통해서 믿음의 오래 참으심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또한 보았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의 모본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23절에서 말씀이 기록되기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해서 머리됨의 모본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것은 특히 아내가 자기 남편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대목입니다.

22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머리됨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구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부분도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모본이 자기를 희생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심 같이 하는 희생적인 사랑의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결혼한 남편들의 모본인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한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는 책임이 있습니다.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몸인 교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에 오시는 그때까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몸인 교회의 지체가 바로 그 순간부터 됐습니다. 에베소서 1장 마지막과 또 2장 마지막에는 몸인 교회가 세워지고 세워져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교회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교회의 세움은 하나님을 향해서입니다.

우리는 계시록 21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는 표현을 우리는 읽습니다. 그 신부 모습을 가진 그것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랑과 함께 있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모든 건물에는 기초가 있습니다. 모퉁이 돌인 기초가 있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지금 있는 근방을 돌아다녀 보니까 많은 건물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건물의 강도 즉 건물의 튼튼함은 기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해 보일지라도 기초가 부실하면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인 기초돌이 되셨습니다. 이 기초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다.

이 모퉁이 돌의 기초라는 것은 구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여기 나오는 말씀처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기초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그 기초를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울은 가르침의 기초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의 터라고 하는 가르침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건물을 지을 때 그 중심적인 기초는 모퉁이돌 즉 기초석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건물이 놓여지는 기초가 되는 모퉁이 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모퉁이 돌 즉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선지들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적인 모퉁이 돌에 대한 것이 모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는 교회가 마치 건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몸인 교회를 지금 2천 년 이상 계속 세우고 계십니다. 이 모든 교회의 기초적인 고안과 구상을 영원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하신 구상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 몸인 교회의 마지막 돌이 놓여질 것입니다. 마지막 어느 한 순간에 돌이 놓여지는 그 순간 몸인 교회가 완성이 되는 시점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몸인 교회는 건물에 비유일 뿐 아니라 또한 몸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이 몸인 교회의 지체가 바로 됐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 됐습니다. 어느 한 날 부모와 살다가 어느 자녀가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 2장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다음에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창세 이후에 최초로 행해진 수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가슴을 열었습니다. 그 아담의 몸에서 떼어낸 그 갈비대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는 것을 히브리말로 세운다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게 하나는 여자라고 하는 형태의 dna를 하나님이 그때 만드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이끄는 그 여자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육체가 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아빠의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표현이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5장 30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창세기 식으로 말한다면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의미에서의 그 몸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편에서는 건물과 같은 비유로 표현되고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는 건물 말입니다. 또한 몸처럼 여러 지체를 가진 몸처럼 몸인 교회가 비유됐습니다. 그 몸인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합니다. 왜 제 손가락이 움직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제 머리가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몸을 머리는 몸을 컨트롤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를 통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십니다. 머리는 하나이며 두 머리가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회 머리인 그 사람을 포 즉 교황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이 주장하기를 자기가 머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하나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물과 같습니다.

또한 몸인 교회는 몸과 같습니다. 마치 여러 지체를 가진 몸 말입니다. 각각 지체들이 각각 움직이지만 내 손이 하는 것을 발이 할 수 없습니다. 눈이 말하기를 손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은 그 본질적으로 다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반드시 필요한 지체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지체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몸 지체에 각각 합당한 지체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는 건물과 유사합니다.

27절에서 말하기를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어느 한 날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신부인 것을 봅니다. 아마 바울은 요한계시록 19장을 떠 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다 하더라”

여기에 몸인 교회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신부로 묘사돼 있습니다. 신부가 결혼식 날 입는 옷은 화려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는 몸인 교회의 모습이 8절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그 모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부정하지 아니한 올바른 행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한 날 몸인 교회, 신부로서 나아갈 때 그 옳은 행실로 시작하거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성도로 옳은 삶을 사는 것은 깨끗한 세마포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신부로 표현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 때문에 신부라고 표현합니다.

몸인 교회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천년 왕국을 세우고 해서 지상으로 오시기 직전에 몸인 교회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신랑 옆을 그 신부에게 준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마음속 옆에도 두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지상으로 오실 때에 모든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님들은 그 그리스도와 함께 옆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는 건물과 같은 비유로 표현되고 또한 몸으로 비유되고 또한 신부로 비유됐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소중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랑을 시작한 것이 언제입니까? 교회를 사랑한 것은 창세 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미래를 이와 같이 시간이 없는 가운데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따라 우리를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미리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어느 한 날 이 몸인 교회가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것들을 우리는 봅니다.

어떤 비유에서는 마치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 부자 장사꾼을 비유로 말했습니다. 이 장사꾼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품질인 진주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어느 한 날 값진 진주를 이 장사꾼이 발견했습니다. 대단한 가치가 있는 진주인 것을 장사꾼은 발견했습니다. 그 진주를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장사꾼이 갖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진주는 몸인 교회에 관한 그림자입니다. 그 장사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내다봤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그 진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팔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십자가 위에서 말입니다. 이 값진 진주인 몸인 교회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진주는 어떻게 생산이 됩니까? 진주 조개가 진주를 생산합니다. 어느 한 날 진주조개가 입을 열고 있을 때 그 진주 조개 안에 자그마한 모래 알갱이가 들어갑니다. 그 머리 알갱이가 진주조개 안에 벽을 긁습니다. 그리고 그 진주조개에게는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긁힘 때문에 그 조개는 그 긁킴을 막으려고 무언가를 분비합니다. 그 긁힌 부분이 딱딱해지면서 그 모래 알갱이를 긁혀낸 그 성분을 감쌉니다. 그 진주조개는 불편하고 그리고 불편해서 더욱더 물질을 분배해서 모래 알갱이를 더 쌉니다. 이렇게 해서 반복하고 반복해서 모래 알갱이를 계속 키워갑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진주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진주는 고통을 통해서 생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생산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비밀이 크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밀이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감춰 있던 것을 비밀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지금 현재는 드러났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특히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 비밀을 이렇게 말합니다.

5절에서 말하기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래서 이전 세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바울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는 교회를 읽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교회를 몰랐습니다.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교회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비밀이었습니다. 이제는 나타내셨습니다. 교회의 비밀이 큰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말씀드린 이런 것들이 5장에서 바울이 말한 배경들입니다. 아침에 에베소서의 실제적으로 행하는 행위 관한 행위에 관한 가르침을 잠시 봤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책임에 대해서 봤습니다.

5장에서 나와 있듯이 방금 읽은 21절에서는 실제적인 행위에 대한 부분의 권면으로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지역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가는 권면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피차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내들에게 즉 여성들에게 바울이 시선을 바꿉니다. 22절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에 거역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가 그렇습니다.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남편을 순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도 남자와 같다라고 사회에서 주장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남자들 못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이 전부다 우월하지도 않습니다.

로마 문화 배경에서는 바울이 이 서신을 쓸 즈음에 로마의 문화적인 배경에서는 남자들로부터 여성들은 압박을 당하는 문화적인 배경이었습니다.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마치 집 안에 있는 여종들처럼,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여성들은 이 시대에도 상당히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성이 남성과 같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서의 질서를 생각해 주십시오.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여성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재료를 취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브의 여성의 머리였습니다. 복된 가정은 이 질서가 지켜지는 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따르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라고 하는 남편의 머리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라는 가운데서 그리고 몸이 주장이 됩니다. 몸을 지키는 가운데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의 큰 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입니다. 물론 몸인 교회입니다. 몸인 교회 모두를 통제하시고 몸인 교회의 모든 일체를 돌보십니다. 바로 몸인 교회입니다. 즉 우리가 이 몸인 교회에 모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아내들을 격려해서 범사에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모일 때 너울을 쓰는 그 이유입니다.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남성의 밑에 있다는 것을 즉 남성의 밑에 복종하는 위치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며 자매님들은 머리를 가립니다. 남자에게 순복한다는 표시로 말입니다. 남자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머리됨에 대해서 고린도서 11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에 관심이 있으면 고린도서 11장 앞부분을 나중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스코틀랜드를 포함해서 전 세계에 있는 사회에 있어서의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여성들이 구원받고 나서도 복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현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바지를 입기를 원하고 남자들은 치마를 입기를 원하고 이것이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남성들이 치마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병들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속으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구분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 남성과 여성은 분명하게 구분이 돼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 남성으로 죽어야 하고 여성은 여성으로 죽어야지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남성으로 태어났다가 여성으로 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또한 남성으로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남자이기 때문에 반대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러한 반대 현상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성들이 많이 남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전환이라고 불리는 현상들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것들은 생소합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사는 나라에서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의사가 어느 지역 병원의 의사며 그리스도인입니다마는 몇 년 전에 그 병원에 일하기 위해서 병원에 왔습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의사가 근무하는 그 병원에 있는 환자인데 이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인데 여성이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성전환을 원했습니다. 그 성전환을 요구했을 때 의사는 안 됩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 성전환을 거부해서 여성의 옷은 여성의 옷으로 남성은 남성의 옷으로 하는 범위를 정했습니다. 그것을 거절했을 때 그 병원에서는 이 의사가 쫓겨났습니다. 이 현상이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바울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근거를 가지고 권면합니다.

 

이번에는 남편으로 주제를 옮깁니다. 바울은 남성 여성 가운데 한 편만 들지 않습니다. 남편도 바울을 통해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아내만 받는 게 아닙니다.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하기를 한 번 사랑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계속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은 무슨 종류의 사랑입니까? 좋은 가슴에 감정을 갖는 사람이겠습니까? 물론 감정적인 사랑도 포함될 것입니다. 어쩌면 더 좋은 감정일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의 진짜 사랑의 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계속할 뿐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고민하고 이 사랑의 모본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은 정도의 사랑을 제 아내에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은 모본으로 사랑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자신을 교회를 왜 주셨겠습니까? 첫째로, 교회를 물로 씻어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사랑하셨습니다.

디도서 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가 복음 말씀에 반응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입에서 나온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에 중생이라는 상화 현상이 벌어지면서 씻음이라고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다고 하는 변화가 그 순간에 있었습니다. 내 속에서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옛 삶과 생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저는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거룩이 주어졌습니다.

나의 새 생명의 특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저도 거룩에 동참하는 시작이 있었습니다. 모든 몸인 교회 지체들은 모두 거룩해졌습니다.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심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말입니다. 왜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하셨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27절에서 이런 목적으로 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깨끗해졌는가 하니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해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 물로 씻는 목욕을 영적으로 이미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발로 움직이는 것 가운데서 일부가 이 세상은 더러워진 타락한 영역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돌아다닐 때 어느 정도 그 세상에 물듭니다. 왜 우리가 매일 말씀을 통해서 씻어야 되는지를 우리는 거기서 이유를 찾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성막 앞에 있는 물두멍에서 몸을 또는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몸도 씻고 또 관계된 부분을 씻습니다. 물로 풀 같은 큰 풀장에 들어가 씻는 게 아니라 그 목욕을 한 번만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8장에 나오는 것인데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을 때에 한 번 있었던 것이 목욕입니다. 모든 옷을 벗고 물로 씻습니다. 아론과 아들들을 옷을 벗긴 다음에 모세가 물을 머리서부터 부어서 목욕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옷을 입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성막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손발을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복음 13장의 다락방에 있었던 일을 아실 겁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왔을 때 어느 한 날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 발만 아니라 발을 시키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발만 아니라 머리와 몸도 씻겨달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물두멍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씻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계속 깨끗하게 유지해야 됩니다.

 

어느 젊은이가 성경을 암송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잘 암송할 수 없는 사람인데 암송하기를 원했습니다. 애들이 암송이 안 됐기 때문에 실망을 했습니다. 어느 한 때 나이 든 성도님을 이 젊은 성도가 방문했습니다.

그 젊은 성도가 문제를 나이든 성도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성경을 읽지만 그러나 그것을 기억을 못합니다’라고 틀어놨습니다.

그 나이든 성도님이 물통을 가리키면서 큰 물통을 하나 가져와서 물통에 물을 들어 올렸습니다.

젊은 성도가 그 물통을 들고 나이 든 성도님 앞에 왔습니다.

그 물통은 구멍이 뚫린 물통인데 물통을 들고 오니까 여기저기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구멍난 물통을 들고 나이 든 성도에게 왔을 때 그 물통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가서 물을 채우라고 젊은 성도에게 나이든 성도님이 말했습니다.

다시 물을 담아다가 왔습니다. 오니까 다시 물통에 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해보라고, 다시 했습니다.

빈 물통을 갖고 왔습니다. 물통을 보라고 그랬습니다.

뭘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물통에 아무것도 없이 물통 안이 깨끗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읽고 잊어버려도 그 말씀으로 물통은 깨끗해지는 것처럼 당신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머리를 읽은 말씀이 깨끗하게 해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깨끗한 영적인 물을 매일 안 남더라도 담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날 에베소서 5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몸인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들어내실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럽다는 말은 대단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상태만 있습니다. 여기는 물론 도덕적인 티나 주름뿐 아니라 어떤 주름도,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깁니다. 저는 주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자매님들은 주름들을 화장품으로 가립니다. 주름은 여러분이 나이가 든다는 하나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몸인 교회는 주름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이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인 교회는 영원히 젊어집니다. 앞으로 교회가 될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입니다.

시간이 갔기 때문에 한두 개만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바울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할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에서 남편들도 자기 안에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되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으로 바울이 말했겠습니까? 제 아내와 저는 한 몸입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 제가 관심을 갖고 있다면 내 몸을 돌본다면 동시에 한 몸이니까 제 아내 몸도 제가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듯이,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 여러분의 몸 상태를 어떤지 볼 겁니다. 몸을 다듬을 때 세수하고 수염을 깎을 겁니다. 몸을 치장하는 것을 남자들이 매일 합니다. 남편들이 자기 몸을 치장하는 것처럼 자기 몸의 반인 다른 한 편인 아내를 치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29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한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는 보양을 하고 있음을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에 보양은 따뜻하게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을 따뜻하게 보호하면 그 사람은 그 사람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마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듯이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남편이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보양한다는 뜻입니다. 양육하고 좋게 한다는 뜻입니다. 부드럽게 돌보고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2023. 5. 7 강서모임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