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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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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녹스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첫 번째 발표자)과 그것을 믿는 사람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몇 번이나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성경 어디에서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합니까?”

“우선 히브리서 1:8에서 예수님을 '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은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내 요점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둘 다 하나님으로 동등합니다.”

“아, 아니, 그렇지 않아! 그것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분명히 아들은 그와 동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적 증거문(히 1:8)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1:9) 때문에 삼위일체론적 문제 본문이 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발표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이 아버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엡 1:3,17)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요 20:17)이라고 부르는 어리둥절한 동반자 구절을 보여줍니다. “보세요!” 그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며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그것과 모순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여정에서의 마지막이자 가장 도전적인 관문에 도달합니다.

 

이 교리는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이 발명품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반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문에 접근할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열쇠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을 봅니다. 이미 언급된 본문을 통해서 그렇게 합시다.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笏)은 의의 홀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주에게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히 1:8-9). [1]

 

두 사람 사이에서 위의 대화 상대는 세 가지 올바른 관찰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한 번에 하나씩 신중하게 고려하고 이 본문이 삼위일체를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테스트할 것입니다.

 

먼저, 8절에서 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식별됩니다. 그것은 단지 아들이 본성상 신성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다음 구절 때문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것 중 어느 것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둘째, 9절에서 주 예수님은 하나님과 구별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까? 동시에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하고 하나님과 구별합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네 하나님”이라는 구절에 이르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이 두 번째 관찰이 삼위일체 교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유대교의 믿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수용자들에게 기자가 쓴 문서에서 하나님으로 식별된 두 위격, 즉 아버지와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 따라서 한 하나님 안에 두 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관찰은 이 모든 삼위일체론적 증거를 뒤집는 것입니까?

 

셋째, 8절과 9절을 종합하면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십니다.[3]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8절에서 아들을 하나님이라 불리고, 9절에서는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두 구절을 합치면 아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삼위일체론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재앙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아들은 분명히 위대하지만 아버지보다 적어도 한 단계 열등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결코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결정적인 마지막 관찰을 놓치고 있습니다.

 

넷째, 1장과 2장을 합치면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두 장은 동일한 구조를 가진 병행 패널과 같습니다. 천사에 대한 제목(1:5, 2:5), 천사에 대한 아들의 우월성(1:5-14, 2:6-18), 천사들에 대한 또 다른 언급(1:14; 2:16)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 두 장은 차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룹니다. 따라서 첫 번째 패널에서 아들이 예배를 받으시는 분(하나님으로서, 1:6)이지만, 두 번째 패널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입니다(우리의 대표자인 사람으로서, 2:12).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나란히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죄를 정결하게 하고 속죄하기 위해서는(히 1:3; 2:17),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히 9:22). 그렇게 하기 위해 아들은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오셔서(히2:9; 1:4)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분의 피 흘림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분은 흠 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히 9:14) – 즉 죄 없는 사람.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주 예수님은 율법의 첫 번째 계명을 포함하여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 20:3 필자의 강조). 그러므로 아들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분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성육신이 되신 적이 없습니다. 1:9에서 “너희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아들의 열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인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반대자들이 제기하는 다른 본문들도 설명합니다(요 20:17; 엡 1:3,17).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던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를 또한 그분의 하나님으로 모셨습니다.

 

요약하자면, 히브리서 1:8-9에서 그리스도를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           따라서 각각 하나님이신 두 위격이 계시지만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

·           아들은 사람이시며 영원히 죄 없는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이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으나 항상 하나님(아버지)을 그의 하나님으로 모실 것입니다(계 3:12).

 

이러한 진리는 삼위일체 교리의 구성 요소입니다. 그리고 잘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그것들을 사람이 만든 신조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얻었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보기 원하신가요?

우리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반박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고려할 여지가 있습니다.

반대의견 1: 1:8에서 아들이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말이 시편 45편의 인용이며 다윗 왕에게 처음으로 말한 것임을 깨달을 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이 단어는 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한다는 의미일 뿐이며 히브리서 1장에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대답: 그 역사적 맥락이 중요하지만 히브리서 1장의 문학적 맥락도 중요합니다. 기자는 시편 45편을 인용함으로써 아들이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밭침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히 1:4-5). 그가 인용한 모든 내용이 예수님이 다윗의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대의를 전혀 돕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감받은 기자의 생각의 흐름을 따른다면 천사들은 변화하는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는 종일뿐이며(히 1:7), 반면에 아들은 신적 통치가 영구적인 하나님[4]이십니다(히 1:8-12). [5]

 

반대의견 2: 신약은 사탄과 심지어 인간 재판관까지도 “신”(들)이라고 부릅니다(고후 4:4; 요 10:35). 그렇다면 예수님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되나요?

대답: 이 인용된 사례와 달리 히브리서 1장의 문맥은 아들이 가능한 가장 높은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아버지와 같이 아들도 예배를 받으시고(1:6) 하나님의 속성(영원성과 불변성, 히 1:11-12), 이름(하나님, 주, 히 1:8-10), 행위(창조와 섭리, 히 1:2-3,10), 보좌(히 1:3,13).[6] 마지막으로 히 1:10-12에 있는 시편 102편의 인용과 관련하여 NIV스타디성경 은 “6절과 같이 야훼에게 …라고 말한 구절이 아들에게 적용된다”라고 지적합니다.

 

반대의견 3: 아들의 성육신이 히 1:9에서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는 이유라는 것은 가능한 설명이지만 이것이 최선의 설명인가요?

대답: 가장 문맥에 맞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요점에 더하여, “너는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였다”의 부정과거 동사는 자연적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한 삶을 가리키며 [7] , 헬라어의 “동료”라는 단어는 히 2:14에서 “참여하다”[8] 단어와 동의어이며 이것은 그의 동료들이 그의 구속받은 백성, 그의 형제임을 암시합니다(히 2:11).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히 1:8-9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이 번역 글의 모든 성경 인용문은 흠정역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2]  신 6:4; 막 12:29; 고전 8:6; 딤전 2:5. 데이비드 구딩의 흔들리지 않는 왕국: 불확실한 시대의 확고한 진리(Port Colborne, ON: Gospel Folio Press, 2002), 31-32, 36-37도 참조하십시오.

[3]  크리스토퍼 애쉬의 도움이 되는 문구 덕분입니다, 당신을 위한 시편: 기도하는 법, 느끼는 법, 노래하는 법 (The Good Book Company, 2020), 126쪽.

[4]  머레이 J. 해리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 예수님에 대한 참조로 하나님의 신약성경 사용 (Eugene, OR: Wipf & Stock, 2008), 216-17.

[5]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평가는 1:5에서 구약 인용문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며 아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실제 아들이 아니라 고대 왕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6]  로버트 M. 보우만과 J. 에드 코모셰프스키, 예수님을 그분의 자리에 앉히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사례(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2007), 278쪽.

[7]  해리스, 하나님이신 예수님, 224-25.

[8]  데니스 E. 존슨, ESV 해설집 Vol. XII: 히브리서 – 계시록 (Wheaton, IL: Crossway Publishers, 2018), 3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