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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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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모본들

짐 커리

빌립보서 2장 전체를 잠시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립보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알기 쉬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빌립보서 2장 같은 경우에는 교리 같은 문제는 없습니다. 빌립보 모임과 바울의 관계는 이상적인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의하면 바울의 전도로 빌립보 모임이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전도를 하러 갔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때때로 바울에게 원조를 했습니다. 바울이 이번에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의 답례로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빌립보 성도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1 1절의 인사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수신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바울의 편지입니다. 이때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 이름도 함께 썼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종이라는 말은 여러분 아시는대로 노예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에 믿는 사람들은 성도라 불림을 받았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바울과 디모데는 종으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절대로 선생이라 불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선생과 성도의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동일한 것을 가르침 받았던 것입니다. 자기도 똑 같은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섬겼던 것입니다. 노예 즉 종이라는 개념으로 들었습니다. 이들도 다른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구속했기 때문에 주님을 주로서 이 사람들은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특별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별한 믿는 자의 성도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하게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성도라는 것은 특별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하나님께 섬기기 위해 성별이 되는 것처럼 우리들도 성별이 되었습니다. 구약에 있는 촛대, , 단 등은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하게 성별되었습니다. 그 물건 자체는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성별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도 하나님 자신과 그 목적을 위해서 성도라고 구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베드로, 성바울, 성요한 같은 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감독들과 집사들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감독들, 집사들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볼 때 빌립보 성도들의 수신으로 편지를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임에는 몇 명의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몇 명의 집사들도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일인목사 일인 선생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모임에서는 장로와 집사는 늘 복수였습니다. 개척단계에서 장로와 집사가 혼자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정인 것입니다. 개척전도일 때 말이죠. 모임이 시작되게 되면 몇 명의 장로나 몇 명의 집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는 법입니다.

이런 빌립보 모임에 바울은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4장에서 보면 바울은 로마에서 이들의 사랑의 선물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빌립보 모임에서 급료를 받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바울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아마 자기가 빌린 집을 감옥으로 갇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랑하는 바울 형제를 위해서 사랑의 선물을 먼 로마까지 보냈습니다. 빌립보서 내용들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매우 단순합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이라는 것을 아주 강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21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는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살아가는 방법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이 편지에는 잘못된 가르침을 다루는 데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사의 편지를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편지에는 9번 모든 것 모든 이라는 말을 통해서 그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1모든 성도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너희 모두를 위하여-HKJ, あなたがたすべてのために)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여기도 4절과 동일하게 모두가 들어있습니다. 8절에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여기도 모든 무리가 들어있습니다. 내가 여러분 모두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 한 명도 제외시키지 않고 모든 성도를 끌어 안으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을 모두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성도 모두를 위해서 감사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빌립보 모임에서는 분열의 위험이 있는 듯 합니다. 4 2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두 자매에 관한 일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 두 자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글레멘드라는 분에게 이 여자들을 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는 아주 좋은 자매인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문제가 생겨 일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두 자매의 문제가 모임 전체의 문제로 확산될 위험에 직면한 듯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선물을 받고 사례를 쓰면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편지에 의하면 믿는 자의 생명이라는 말이 매우 강조되고 있습니다. 1장에 의하면 우리들의 생명의 본질은 그리스도다. 2장에서는 우리들의 생명의 모본은 그리스도다. 3장에서는 우리들의 생명의 목적은 그리스도다. 4장에서는 우리들의 생명의 힘은 그리스도다. 이 말씀은 각각 장에서 나오는 것을 천천히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생명의 모본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모본이라고 하는 것이 4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모본이다. 두번째는 바울이 모본이고, 세번째는 디모데가 모본이고, 네번째는 에바브라디도가 모본입니다. 이 네가지 모본을 통해서 실제로 모본이 어떤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0절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모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비었습니다. 두번째는 바울이 모본이 됩니다. 바울은 신실의 모본입니다. 여러분의 선물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제물같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삶은 여러분의 제물 위에 관제(포도주를 제물에 붓는)와 같은 삶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명예 같은 것들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들의 원조로 말미암아 아주 기뻐했습니다. 세번째 모본은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의 모본은 현실적인 모본입니다. 디모데는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마음을 썼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돌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완전이 같은 영적으로 가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충실의 모본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죽음에 직면하였음에도 충성스러우므로 빌립보 성도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선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네가지 모본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그 모임은 상당히 복될 것입니다.

처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계십니다. 먼 옛날부터 그리스도를 본 천사들은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천국에 영원히 계셨어도 아무도 불평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들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7절에 보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이유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인이 종이 되었다면 자기 자신을 선생이라고 감히 못할 것입니다. 어쨌던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과 같이 되셔서 축복해주셨습니다. 복종하셨는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첫째로 주님이 자기를 비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영어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비었기 때문에 속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사실 위험한 말입니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졌는데 자기를 비었다고 해서 주님은 주님으로서의 성질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되시는 그 속성을 계속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태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실 때에 가지신 속성 그대로 마리아의 태에 있을 때에도 그 속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자신을 비었겠습니까?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육신을 통해서 그 속성을 가리셨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계신 주님을 볼 때 목수의 아들로 본건 같습니다. 주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갔을 때 어떻게 되셨습니까? 육체에 가려졌던 영광이 거기서 빛나버렸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나님 되신 영광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성막 외에 영광의 구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해주셨습니다. 주님이 지상에 거하시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막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가면 그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의 성막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막은 육체를 가진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막을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주변에 둘러쳐진 흰 천을 보았겠지요. 그 흰 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고 깨끗한 육체를 말합니다. 실제 영광은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었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소 안에 있는 영광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가리어졌을 따름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육체를 가지고 그 영광을 가리었습니다. 자신을 비었다고 하는 것은 이 말입니다. 종의 육체를 가지신 주님은 다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입니다. 즉 십자가에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최고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이 그 모본을 보여 주셨다면 우리들이 그 모본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높이 되셨습니다. 모든 자보다 높이 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주님이십니다. 이분이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을 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겸손의 모본입니다.

두번째 모본은 바울 자신이 모본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과 디모데, 에바브라디도는 충성스러운 종입니다. 이들의 모본은 주님의 모본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모본을 본받음 같이 우리들도 이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은 놀라운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선 바울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보낸 원조의 선물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아름다운 제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 앞에 번제가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로 말미암아 아주 향기로운 향을 맡으십니다. 바울의 생각은 빌립보 성도들이 원조한 것은 바로 번제와 같은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의하면 그 번제에다가 약간의 전제라고 하는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이 전제도 번제의 일부로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원조는 번제고 바울이 살은 30년 동안의 섬김은 번제 위에 드려지는 관제라고 17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그렇게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을 그들이 드렸으니까요. 바울 자신이 30년 동안 평생을 섬긴 것은 이미 그들이 드리는 제물 위에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신실한 자입니다. 바울은 그들보다도 훌륭하다던가 평판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의 모임을 섬기면서 이러한 마음으로 섬깁니까? 나의 평판은 특별하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임의 성도들을 섬기는 그 섬김이 나의 기쁨이다.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바울을 본 받는 것이겠지요.

세번째 모본은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에 관한 것은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들의 사정에 대해서 신실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돌보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디모데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일을 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는 빌립보 성도 여러분의 일을 구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하듯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다고 말했습니다. 21절에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하면서 돌본다는 의미를 가진 것은 놀랍습니다. 20절에 실제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가족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사정을 진실히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 같은 것을 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는 모임에 여러분들과 함께 같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같은 가족이 서로 돌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디모데는 그 마음을 잘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사자로 또는 심부름꾼으로 여기저기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매우 강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 대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성도들을 돌볼 때 바울 자신처럼 돌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즈음에 바울은 나이가 점점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처럼 생각한다면 바울의 그때 나이가 많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빌립보서를 썼을 때 약 육십 몇 세쯤 되었겠지요. 30년 동안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러 번 죽음에 직면했을 정도로 말이죠. 역시 60여세 되었지만 바울은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나이든 나 바울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디모데가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의 마음과 나의 바울은 같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도 디모데에게 성도들을 돌보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그렇게 했습니다. 같은 가족이라고 강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모임에 성도들을 그러한 마음으로 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번째 모본은 에바브라디도입니다. 충성스러움에 대한 모본이죠.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 모임의 한 성도였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 사랑의 선물을 보내려고 할 때에 에바브라디도라는 성도를 택했습니다. 에바브라디도의 손에 사랑의 선물을 들려서 로마까지 보내자고 그들에 의해 정했습니다. 아마 많은 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바브라디도가 바울에게까지 그 선물이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 큰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가는 도중에 병이 들었습니다. 이 병이 심해서 아마 죽기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자기의 병든 것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매우 근심했습니다. 병이 든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에바브라디도가 걱정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근심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는 병듦에도 불구하고 로마까지 가서 사랑의 선물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바브라디도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대표하는 에바브라디도가 로마에서 죽었다면 바울은 더욱더 슬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서 에바브라디도를 낫게 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 에바브라디도의 손에 편지를 들려서 보낸 것 같습니다. 28절에 보면 그들이 에바브라디도를 보면 매우 기뻐하겠지요. 29절에 보면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에바브라디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 정도의 병이 난 것 같습니다. 자기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받은 임명 즉 부탁이라고 보여집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랑하는 바울이 있는 데까지 모두가 갈 수는 없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그 부족한 것을 메우고 싶다고 해서 자기가 병이 들더라도 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로마까지 가는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 네 모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우리들이 이 네가지 모본을 통해서 그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평판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신실하게 형제 자매들을 돌보는 것, 그들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하는 종이 되어야 되겠죠. 이렇게 모임에서 행한다면 모임에서 분열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2002 1 24 광주북부모임 (호남지역 장로들과의 교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