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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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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된교회와 지역교회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또한 즐겁게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금요일부터 마태복음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밤에는 16장을 함께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13~20절입니다.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4가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1~4장까지 왕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참으로 충분하게 왕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두번째는 5~7장인데 왕의 단언(斷言)이라고 하는 곳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그 왕국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한 사실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전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저희들이 13장의 7가지 비유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7가지 비유를 가지고 현재의 사정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14장부터 18장까지입니다. 저희들은 마태복음 1장부터 살피면서 사실은 18장을 바라보면서 교제해왔습니다. 왜냐하면 18장에는 지금 현재 있는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16장에서는 이 시대에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방금 읽은 수절의 말씀에서는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같은 16장에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자로서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가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17장에 들어가면 주님께서는 영광을 보이시기도 하시며 그리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장면은 변화산상입니다. 주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사실은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의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육체를 가지고 그 영광을 가리셨습니다. 지상에 계실 때 사람들은 주님을 요셉의 아들로 다윗의 자손으로 보았겠지요. 그러나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에는 그 실제의 본 영광을 갑자기 드러내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굉장히 빛나는 광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산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18장에 들어와서는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현재 믿는 자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지역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8장에서 처음으로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후에 몇십번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말은 보통 건물에 연결해서 사용해버립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벽돌이나 돌로서 사람이 세운 건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건물은 건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건물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전국에 있는 단체들이 같은 동맹 안에 들어있으면 한국에 있는 무슨무슨 교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교회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약성경 나머지 부분을 잘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라는 말은 없습니다. 또한 터어키 교회라는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교회도 없습니다. 교회라고 한다면 지역에 모여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후서에 의하면 고린도에는 지역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은 11장에서 너희가 한 곳에 모일 때 이러이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는 이것이 복수가 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 하는 말은 복수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몇 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마태복음 18장에는 교회에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손으로 벽돌로 만든 건물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교회당을 향해서 여러분이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일본에 오래 있다 보니까 약간 돈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동맹도 아닙니다. 그러나 큰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라는 의미는 불러냄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 어떤 곳에는 그 나라의 국회(민회)를 교회라고 부른 적은 했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나라의 일을 정하기 위해서 의원들이 각지방에서 나와서 의회를 구성하는데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출신지역에서 나와서 민회가 모이는 그 지역으로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나와서 모인 무리 이런 의미였습니다.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서 모여온 무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국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전부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부터 나아오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결한 신부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가 많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당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합해서 몸된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몸된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생일은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믿는 자는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기 직전에 그 몸된교회에 더해지는 자입니다.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은 몸된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교파에 속해 있어도 그 사람이 참으로 믿는 자라면 몸된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몸된교회는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남녀의 구별도 여기는 없습니다. 한국인 외국인이라는 구별도 없습니다. 또한 자유자나 노예의 구별도 없습니다. 모두 한 몸의 기관입니다. 물론 우리 몸에서 어떤 기관은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어떤 기관은 그리 중요한 기능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손과 눈과 귀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어떤 몸 속에 있는 기관은 눈만큼 중요한 기능을 안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하나입니다. 몸된교회는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 몸된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순절부터 주님의 공중재림까지 모든 믿는 사람들은 이 몸된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구별하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만 말합니다. 여기는 선생과 학생이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 형제 자매들입니다. 이것은 몸된교회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몸된교회의 가르침은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16장 주님이 나타내신 바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떤이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이는 세레요한이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6 16절은 베드로가 대단히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토대가 시몬 베드로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의 편지에서 그 기초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주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그 토대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라는 말은 역시 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베드로가 돌이라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기초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라는 말은 돌, 돌멩이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옳습니다. 작은 돌멩이라는 의미입니다. 발로 찰 수 있는 정도의 돌멩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문법적으로 여성어라고 합니다. 일본어처럼 한국어에도 명사에 남녀 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유럽의 언어들 가운데에는 명사에 남녀 성 구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도 성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어에서 배를 가리킬 때 여성어를 사용해서 그녀라고 표현합니다. 배에 대해서 그라는 남성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라는 여성어를 씁니다. 그 명사에는 성의 구별이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말은 돌멩이면서도 여성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건물을 짓는 토대의 주춧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서 그 돌멩이를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돌멩이를 찬다면 발이 아플 것입니다. 이 반석은 차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남성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원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놀라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더해질 수 없습니다. 몸된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움직일 수 없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몸된교회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회나 모임에서 조차도 소위 말하는 몸된교회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몸된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지배에 이 몸된교회가 참여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로 거듭난 가운데 몸된교회의 한 기관입니까? 참된 믿는 자라면 어느 교파에 속해 있든지 간에 몸된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와 관계없다 할지라도 참된 신자라면 몸된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해있는가에 따라서 이 몸된교회에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몸된교회의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받았습니까? 분명히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10장에서 분명히 베드로는 그 열쇠를 사용했습니다. 오순절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베드로가 서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부근에서 5천명가량 믿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천국의 열쇠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10장에서도 이방인을 위해서 이 열쇠를 베드로가 사용했습니다. 고넬료라는 사람은 가족과 함께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천국열쇠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므로 말미암아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또 한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해석하여 이렇게 설명 말합니다. 베드로는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받았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베드로를 뒤를 잇는 그들의 교회도 베드로처럼 죄를 용서하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런 권세를 받았다면 18장에 나오는 지역교회도 그런 권세를 가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권리를 가진다면 지역교회도 동일한 권리를 가지겠지요. 그러나 지역교회는 결코 죄를 용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의 죄를 다루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므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의 죄를 풀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풀려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묶인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매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만약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이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죄가 묶인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베드로를 비롯해서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정해진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그 사람들이 땅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찬성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늘에서 정해진 것을 말씀을 전하므로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의 죄는 용서되어버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는 묶인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권리가 주어진 것은 진귀합니다. 18장에 지역교회도 동일한 권리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럼 몸된교회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순절부터 주님의 공중재림까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이 몸된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 기간 동안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와 관계없이 몸된 주님의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믿는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 같은 이름을 우리가 취하겠습니까? 나는 다른 교파를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예를 들면 만약 내가 감리교, 장로교회 교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 사이에는 제가 사용한 말 그것으로 구별이 생겨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성도라고 말한다면 저도 성도입니다. 믿는 자라고 말을 사용한다면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자입니다.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우리의 책임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하는 어떤 이름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이름이더라도. 예를 들면 루터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루터란 형제는 옛날에 굉장히 놀라운 형제였습니다. 우리들이 루터교에 속해 있습니까? 루터교에 속해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많은 형제자매들과 구별을 그 사람은 이미 해버린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게 붙인 이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는 몸된교회에 한 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주일날에 한 떡과 잔에 참여한다면 한 떡과 잔에 참여하는 하나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떡이 하나이요 잔이 하나라는 것은 모든 믿는 자가 한 몸된교회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아주 자그마한 분잔을 많이 사용하는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는 웨이프라고 하는 작은 떡덩어리를 미리 만들어가지고 사용하는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떡과 잔이 하나라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빼앗겨버리는 것입니다. 몸된교회라고 하는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오순절부터 주님의 공중에 오실 때까지 믿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의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동안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몸된교회로서 모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된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주님 나라에 들어가버렸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 시대는 역시 마지막 때입니다. 앞으로 태어나는 믿는 자들이 많지 않겠지요. 대부분의 믿는 자들은 이미 주님 나라에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몸된교회는 지상에서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으로 모여야 될 터입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따로따로 모이면서 주님 앞에서 증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역교회를 통해서 몸된교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구별도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여자들이 남자 위에 서거나 남자를 지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 또한 지역교회는 나라와 나라가 구별되어있습니다.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영어만 하는 사람들이 2,30명 정도 서울에 모인다면 영어만 하는 모임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경우라도 그 형제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내의 모임에 속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지역에 영어만을 사용하는 모임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우리들은 거기는 외국인의 교회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구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일본 어디라 할지라도 같은 본질이 있습니다. 각각 지역교회는 몸된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린대로 주일마다 떡과 잔을 나누며 떡이 하나요 잔이 하나인 것을 나타내며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제 옆에 있는 실()에서 떡 하나 잔 하나를 놓고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역교회가 몸된교회의 특질을 잘 나타내야 합니다. 지역교회도 몸된교회로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역교회는 몸된교회의 일부가 아닙니다. 지역교회 성도 한 분 한 분은 그 지역교회의 지체입니다. 성질로 말하자면 각각 다르겠지요. 주님은 주로 시인하기 때문에 많은 다른 성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인 것을 나타냅니다. 왜 성질과 성격이 다르면서도 하나로 모여서 일치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 중심으로 모두 주님을 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 20절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며 순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가 진정으로 주님을 순종한다면 일치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또한 저의 의지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8 20절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그럼 지역교회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가버렸습니다만 집에 가셔서 1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한번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또한 용서해 주어야 된다고 뒤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만큼 용서를 해야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말하기를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그랬습니다. 주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490번까지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항상 형제를 용서해줄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비유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나쁜 일을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죄를 범한 그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직접 그에게 친절한 태도를 가지고 말해야 됩니다. 형제여! 전날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의 말은 나를 상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취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고 친하게 지내겠습니다. 상대방은 정말 죄를 범했으면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마땅히 해야 합니다.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 이런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사과를 합니다. 서로간에 문제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아마 이전보다 더 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는 사과 안하겠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모임에 있는 증인을 한 사람 더 데리고 다시 갑니다. 동일한 것을 가지고 권해야 할 것입니다. 제발 모임의 일치를 위해서 이것을 취소하십시오. 서로 용서하겠습니다. 들어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옆에 증인으로 갔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증인으로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공공연하게 이것을 말하는 것은 나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안들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번에는 교회에다가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교회당 건물에다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무슨 교회협의회 이런데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임인 성도들의 모임에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서 이 사람이 이런 일을 말하는데 사과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교회는 장로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시라도 빨리 교회 일치를 위해서 사과하시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들으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조금 커졌지만 끝났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으면 엄숙해집니다. 만약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이방인과 세리는 모임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출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교회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출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지켜야 하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사실이 지역모임을 통해서 보존되고 행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 즉 지역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몇 번이나 형제를 용서하오리까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번이면 족하지 않겠나 라고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번만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결코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사과하면 용서해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 이런 태도가 늘 있다면 문제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역교회의 본질은 이와 같이 엄숙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본질에 우리들이 합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18장에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왕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빚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7천억원 정도의 큰 빚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어로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700만 달러 정도이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전혀 갚을 수가 없습니다. 왕은 다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 종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했습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받은 종은 그 주인을 떠나 나갔습니다. 자기에게 빚이 있는 또 다른 자기와 같은 종을 만났습니다. 같은 동료의 빚은 약 75만원 정도의 빚이었습니다. 아주 얼마 안되는 빚이었습니다. 75만원 정도를 갚으라고 다그쳤습니다. 이 동료의 종은 지금 안되니까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사람을 옥졸에게 붙여버렸습니다. 빚진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버렸습니다. 주인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받았는데 그렇게 조그만 빚을 탕감해줄 수 없는 종을. 여러분과 제가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와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빚을 어느 정도 용서해 주셨습니까? 셀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변제할 수 없는 그러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나쁜 일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큰 것이 아니죠. 이것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까? 한번 용서할 수 있으니까 일곱번 용서할 수 없습니까? 490번은 안되겠습니까? 될 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임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18장까지 이렇게 교제해 오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아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1850년경부터 여기저기 지역교회가 생겼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 세대에는 지역교회 진리가 나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세대에는 하나님께 돌아간 성도들로 말미암아 이 진리가 분명하게 되었겠지요. 어느 시대던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실행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각각 지역모임에 계신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에 서서 개인적으로 또는 모임적으로 단순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십시다. 고맙습니다.

2002 1 21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