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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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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의 여덟 명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가운데 특별말씀집회에 와 주신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크게 복주시기를 제가 기도드립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여기저기에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구약에서 삼손, 기드온, 히스기야, 등등을 교제했습니다. 거기에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도 교제를 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신약에 나오는 여덟 명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 여덟 명은 골로새서 4 7~14절에서 나오는 여덟 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구약성경 아모스 3 3절에서 그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동행하겠느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4장에서 참으로 자기와 함께 행하고 한 마음이 되어있던 여덟 명을 가지고 인사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들의 영적인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비로 전세를 내어서 살던 집에 있을 때 기록한 서신입니다. 즉 사도행전 28장 말씀 그대로입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서로 자매간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아마 양쪽 다 그 지역에 보내진 것일 것입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골로새서 1장을 보게 되면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쓴 그때까지 골로새에 간 적이 없습니다. 이 내용에 의해서 그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골로새에 속해있는 성도 일부를 알고 있는듯합니다. 한 사람은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이라고 하는 작은 서신은 바울이 직접 써서 빌레몬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은 빌레몬의 가족들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 골로새서가 기록되었는지가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모임에 들어올 수 있는 가치론이라는 이론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가치론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지식이 점점 많아지면 더욱 복을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서신서를 잘 조사해보면 가치론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에는 3가지가 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적인 철학이 그 하나입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영적이 되려면 더 지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천사들을 알아야 된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무수한 천사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형편없는 존재이며 천사들은 훌륭한 존재들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면 좋다고 그들이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 중에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중보자 같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무수한 중재자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1장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장 뛰어나심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위해서 그 자리를 예비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세상적인 면, 영적인 면, 우주적인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천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천사나 나쁜 천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나 전부 다 그리스도의 발 밑에 있는 것입니다. 2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난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선 가치론이라는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아가기 때문에 나쁘다고 가르쳤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이 늘 그랬던 것처럼 이 서신에서는 무엇보다도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천사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믿어야 되는지 기록되어있습니다. 골로새서 1,2장에는 그러한 것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 후반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무엇을 행해야 될 것인가를 기록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잘 아신다고 생각합니다만 바울의 서신에는 대체적으로 이와 같이 두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음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 또한 우리들이 믿는 것 전체가 믿음이기도 합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에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믿음을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은 입술로만 나타내어서는 안됩니다. 3,4장은 우리들의 행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가치론은 잘못되었습니다. 이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儀式)입니다. 특히 2장 마지막 부분을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문(儀文)이라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의식 즉 의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그대로 각가지 절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에게 각가지 제한도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처럼 이것은 해서 안되고 저것은 안되고 하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역시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지식으로 들어가면 더욱 이 의문들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지식을 가르친 사람들이 이 비밀스런 지식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반적인 믿는 자들에게는 그 단계를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이 갖고 있는 비밀스런 지식을 알게 되면 일반 믿는 자들보다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소위 기독교계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일반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몰몬교는 더욱 더 그렇지 않습니까? 이들은 옛날부터 있는 그 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몰몬교 신자들은 틀림없이 미래는 하나님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몰몬교도로서 여러가지 지식의 단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믿는 자들은 이 비밀스런 지식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분 아니라 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면 안되고, 그들은 커피를 마셔도 안되고, 물론 담배를 피워서도 안되고, 물론 차나 커피나 담배를 안마시고 안 피우고 싶으면 안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믿는 자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현대 의학에 따르면 이 담배는 몸을 해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금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이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믿는 자가 되면 전연 그런 것을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몰몬교도들은 금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잘못된 가르침이 골로새에 있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게 잘못된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골로새서에 의하면 그들의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지식적인 단계에 올라가면서 어떤 의식을 즉 의문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늘에서와 동시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도 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의문의 의식적인 면에서 종교적인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면에서는 거의 제한이 없었습니다. 어떤 욕망이나 욕구에 따라서 행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서신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라고 먼저 말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의문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의 배경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골로새서에서 내용을 잘 알기 위해서 네가지 작은 말에 주의를 하십시다. 1 15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독생자로서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서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형적인 외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특징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말씀들을 잘 아실 것입니다만 나중에 서신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외관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주님은 어느 때에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소위 변화산이라 불리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몸으로 보입니다. 그 변화산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영광이 갑자기 밖으로 배출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금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혈육을 가지고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특징이 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 그 특징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혈육이라는 몸을 가지고 그 특징의 일부를 감추셨습니다. 그 특징에 혈육을 입으신 것입니다. 1장에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천사라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1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2 2절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비밀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 동일한 것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 우주에 있는 존재들이 보도록 드러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를 보존하지 않으시면 진짜 빅뱅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질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 우주가 혼동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옛날옛날부터 감소되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드러났습니다.

3 12절을 봐주십시오. 하나님의 택하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들을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주 예수님을 주님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백성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4 12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입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인 바로 그 몸입니다. 골로새서 보다 물론 몸에 대해서는 에베소서에서 구체적이지만 둘 다 같은 몸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과 제가 바로 이와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밤 저희들은 골로새서 4 7~14절까지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4 7~14절까지의 배경입니다.

3,4장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임과 가정생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의 생활, 사업에서의 생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나의 형제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내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또는 아내로서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또한 사업이나, 사회에서 주위에 잇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짧지만 3,4장 앞 부분에서는 이것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침례의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생명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기 위하여 부활했습니다. 실제적인 결과는 앞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여러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7절에서 14절까지 나오는 여덟명에 대해서 이 서신이 이것에 대해서 무언가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실제적인 것은 여기서 많이 가르침 받습니다.

7절에 보면 두기고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두기고라는 사람은 사랑하는 형제라고 불립니다. 신실한 일군, 동역자인 두기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형제는 신실했습니다. 매우 사랑받는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동역한 사람이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보냄을 받고 그들의 사정을 알게 했습니다. 두기고라는 말의 의미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두기고는 매우 복스러운 형제였습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의 눈 앞에 두기고는 이러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쓸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직접 알리지 못하기 때문에 두기고가 가면 사정을 알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두기고에게 자기의 내적인 사정, 즉 비밀스런 사정을 전부다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두기고라는 형제에게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있는 사사로운 것 즉 사정까지 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모임에서 피차간에 서로 이렇게 신용을 얻고 있습니까? 특히 장로들은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할 터입니다. 하나님의 모임에는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가운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위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두기고 같은 분이 있으면 두려워 않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장로들은 믿는 자들로부터 그 사정을 듣고 자기 아내한테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모임에 그와 같이 두기고 같은 분이 있고 믿는 성도들이 두기고 같이 믿어준다면 참으로 복스럽습니다. 신실한 일군이고 사랑받는 형제이고 바울의 동역자라면 바울은 그를 의지할 수가 있으며 복스럽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오네시모라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시는대로 이후에 쓴 서신 가운데 빌레몬서라는 짧은 서신이 있습니다. 짧은 빌레몬서는 오네시모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처음에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주인인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서 로마까지 갔습니다. 무언가에 의해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던 로마에서 만났습니다. 아마 로마에서 만나서 믿는 자가 되어 인도받았습니다. 믿었다고 해서 과거는 어째도 좋다는 생각은 좋지 않습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자기 상전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 당시 도망간 종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어쨌던 돌아가라고 권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옳습니다. 믿기 이전의 잘못을 이제 믿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수년 전에 밴쿠버에서 두 명의 젊은이들이 믿었습니다. 그들은 히피족이었습니다. 마약 등을 사용했습니다. 외면까지도 이상스러웠습니다. 그 가운데 경찰에서 도망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짜 구원받았는데 침례를 받고 싶었습니다. 형제들은 충고했습니다. 먼저 경찰에 관한 그 일을 처리하시오. 그렇게 했습니다. 형을 받고 1년 정도 형무소에서 지냈습니다. 석방된 후에 모임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네시모여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시오. 어쩌면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사랑하는 빌레몬이여 이 오네시모를 이번에는 형제로 영접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유익한 자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으로서가 아니고 사랑하는 형제로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영접하듯이 오네시모를 영접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무슨 빚이 있으면 내가 갚으리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오네시모는 얼마나 안심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겠습니까! 여기는 오네시모가 용서받은 자로서 나옵니다. 그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자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는 유익한 자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믿고 변해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생활가운데 변화가 없다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변화가 없다면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10절에 있는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입니다. 아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죄수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분은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며, 매우 모본적인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라는 이름은 매우 재미 있습니다. 의미는 뛰어난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오네시모는 종이었지만 아리스다고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귀족의 자녀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귀족으로 태어난 아리스다고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시련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의 바램은 그랬을 것입니다. 시련 후에 자기 아들이 어떤 곳이나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동참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의하면 소요가 있었을 때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선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따르면 그 배가 깨어졌을 때 바울과 함께 아리스다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기록된 대로 언제 그랬는지 모르지만 바울과 함께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우리들을 위해서 참된 의미로 모본입니다. 때가 좋던 나쁘던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일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그러한 믿는 자들입니까? 모임이 모두 좋기 때문에 내가 기쁨으로 참석한다. 문제가 생기면 어떠합니까? 도망갈 생각이 있으십니까? 아리스다고처럼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함께 서십시다.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젊은 분이 여자분과 사귀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폭풍우 속도 지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그럼 만약 비가 오지 않으면 또 내일 밤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폭풍우를 헤치고 뭐든지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비가 오면 못 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조금 비가 오면 도망가버립니다. 아리스다고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음 두 사람은 마가와 유스도인데 유대인 같습니다. 마가는 요한 마가를 말합니다. 마가는 처음 전도여행에서 집으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왜 돌아갔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아마 마가는 엄한 유대인 가정에 살았기 때문에 바울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못 견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한 유대인으로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방인과 교제하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됩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기분이 안 좋아졌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그렇겠지요. 한국에 온 어떤 분들이 한국사람이 먹는 것을 다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외국에 간다면 동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도를 위해서 20여개 나라를 다녔습니다. 여러가지 재미있는 것들을 먹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제가 먹습니다. 이 마가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참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가버렸습니다. 이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다투었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마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일부러 말했습니다. 이제 주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간다면 영접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바나바와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이제는 해결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모임에서 형제와 형제 가운데, 자매와 자매 가운데 문제가 일어납니다. 흔치 않지만 어떤 때는 분열이 일어날 정도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일시라도 이것을 고칩시다. 빨리 서로 용서합시다. 마태복음 18장 후반처럼 우리가 용서받은 대로 용서를 해야 합니다. 여기는 바울이 자기가 이전에 했던 일을 고백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패한 마가에게 두번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가는 틀림없이 회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임에는 이 정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네번째 사람도 재미있습니다. 유스도라는 사람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주 예수님과 완전히 같은 이름입니다. 마가와 유스도는 바울을 강하게 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격려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마가의 모습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형편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셋집에 있었지만 로마 군인들이 거기서 파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미음대로 아무데나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가와 예수라는 유스도는 바울을 위로했던 것 같습니다. 이 유스도라는 예수는 참으로 존귀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날 왕은 보초들을 살펴보기 위해서 진영을 돌아보았습니다. 칠칠치 못한 보초가 있는데 갔습니다. 그 병사의 모습이 병사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병에게는 그 진영을 지키는 책임이 있습니다. 매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그 병사가 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병사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 저는 알렉산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행색을 바꾸라 안 그러면 이름을 바꾸라 우리들은 존귀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이 존귀한 이름에 걸맞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알렉산더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이름을 하루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4 12절에서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름이 나옵니다. 에바브라라는 사람입니다. 골로새 성도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골로새 모임은 에바브라로 말미암아 세워졌을 것입니다. 어쨌던 지금은 로마에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골로새에서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에바브라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항상 너희를 위해서 애써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골로새 성도들이 마음에 걸려서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에바브라가 그들을 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일곱번째 사람은 14절에 사랑 받는 누가라는 형제입니다. 사랑 받는 의원 누가.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후반은 사도행전입니다. 누가의 붓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활동과 그 이후의 활동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누가에 대해서 기록된 것은 이 14절뿐입니다. 그는 의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두번째 투옥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났지만 누가만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성경의 반 전도를 기록한 바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것 외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던 직접적인 것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이지 않은 것은 몇 군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매우 흥미로운게 있습니다. 바울이 그 감옥에서 쓴 편지 가운데 의학 전문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같은 편지에는 없는 의학 전문용어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건전한 가르침, 건전한 행위 등등입니다. 그것은 의사 선생님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문용어였습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정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과 함께 있으므로 말미암아 누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듯합니다. 자기가 쓰는 말조차도 누가를 통해서 배운 것 같습니다. 누가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존경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의사 일을 버리고 수년 동안 바울과 함께 수고를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선생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물론 오늘날 위대한 정치가나 왕들은 자기의 전문인을 데리고 다닙니다. 미국의 대통령, 총리대신, 영국의 여왕 등은 외국으로 나가면 그의 주치의를 데리고 다닙니다. 많은 고난을 받은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주치의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누가는 그 정도로 사랑 받는 형제였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바울을 돌보기 위해서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임에서 이러한 마음을 나타냅니까? 피차간에 돌봄을 위해서 일을 하십니까?

마지막으로 14절에 데마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데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사랑 받는 형제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실한 동역자인지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두 곳에 데마 이름이 나옵니다. 다른 한 곳은 이와 똑같이 이름만 나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슬픕니다. 데마는 믿음을 버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데마는 감옥에 있는 바울이 얼마 있으면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바울과 끝까지 바울과 함께 했다면 나도 벌을 받겠지 했을 것입니다. 그 미래를 맞을 수가 없다고 데마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바울을 두고 도망가버렸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데마에 대해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에 여기나 다른 곳에서나 데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덟 명을 우리가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모본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데마처럼 된다면 매우 유감스럽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떻게든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주님을 위해서 순종하고자 한다면 시련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장을 봐주십시오. 6~8절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은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을 끝까지 이루었습니다. 달려갈 길을 달려갔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울의 확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겠습니까? 디모데후서를 기억하면서 바울의 본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2006 10 17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