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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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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오심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교제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과 내일에 이어서 교제를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 1~10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시()는 바울시대에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동쪽으로 갈 때에 딸려 잇는 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시대에 데살로니가 시()는 매우 오래된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7 1~17절가지 나중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기 전에 먼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기록은 사도행전 16장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바울과 실라가 매우 모욕을 당했습니다. 박해 가운데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모임이 성립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곧바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바울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계속하여 전했던 것은 우리들의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심한 박해가 있어도 바울의 활동에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는 바울처럼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방해되었다고 해서 복음전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은 우리들의 부끄러움입니다. 동시에 데살로니가 시()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 현재도 살로니가라는 이름으로 존속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다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다르면 세 안식일 즉 3주간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 17 3절을 보게 되면 바울은 거기서 무엇을 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물론 이 회당에는 성경을 아는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전하게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명과 더불어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여기서 3주간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3주만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모임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미국이나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나가서 3주 만에 모임이 생긴다는 것은 요즘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사는 나라에서는 모임이 세워지려면 보통은 수년이 걸립니다. 이 당시 데살로니가를 포함한 이 도시들에는 특별한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회당에 모이는 모두는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오셔야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에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한국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가 머지않아 오신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을 처음 듣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첫날에 복음을 듣고 ‘예, 믿습니다’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우상이 있는 나라에서는 그러한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바울이 한 방법은 우선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설명했다는 ‘뜻을 풀어’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해석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그와 같이 말씀의 듯을 풀어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기의 생각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모든 것은 이 책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반대한다면 그들에게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증명을 해서 그들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분명히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들 사회에는 철학 같은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학교 등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습니다. 자기자녀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왜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인간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계의 미래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성경이 설명하면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뜻을 잘 풀어 설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사도행전을 비교하면서 보게 되면 데살로니가전서에는 크게 바울의 생각이 세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고난과 죽음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풀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이외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해서도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7 7절을 보게 되면 그렇다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시저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다른 왕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왕인 것을 말하고 다시 오실 것도 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황제 시저가 최종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최종적인 주권이 가시면류관을 쓰셨던 그리스도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동일한 말씀을 그렇게 전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도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분은 우주의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지상에 오실 때 많은 면류관을 가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스도의 주권도 전했습니다.

세번째는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 5절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고, 머지 않아 영광가운데 다시 오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현재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전 세계가 그리스도를 맞이할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서울, 와싱턴, 런던, 모스크바 등에서 주님이 오시면 주님의 주권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지상까지 오십니다. 왕의 왕으로서 오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전에 주님 앞으로 들려 올라갑니다. 이것은 교회의 휴거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주님께서 오늘밤 오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밤 주님께서 공중에 오신다면 이 모임 장소는 텅빈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난 일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오늘밤 말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천천히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날,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불러 올리시는 날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는 주의 날, 곧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매우 진지한 특징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각 장마다 각각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읽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쪽 전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하는 주제를 말할 수는 있지마는 그러나 전후서를 쓰는 이유는 세개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전서 1 2절을 보면 우리가 하는 것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말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처음에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데살로니가 믿는 사람들은 믿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참으로 짧은 기간 데살로니가에 있었습니다. 심한 박해로 인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그만 전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를 떠났다고 생각은 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지 않도록 바울은 빨리 데살로니가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박해의 표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나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자신처럼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는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의 사정을 알아보았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장에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가 돌아왔기 때문에 2절 말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2,3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박해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은 믿음에 어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 동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때문에 항상 감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역사, 그들의 사랑의 수고, 그들의 소망의 인내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목적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섬기므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기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2,3장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믿은 복음에 대해서, 그 복음의 욕구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복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 복음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매일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복음은 매우 간단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합니다.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렇게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위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계시겠습니다만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도 동일하게 입력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믿는 자들에게 스스로 본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었고 복음은 그들에게 행위를 요구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입니다. 복음의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데살로니가 믿는 자들은 영적으로 어림으로 복음을 듣고 아마 착각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4장과 후서 2장을 나중에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죽은 것 같습니다. 믿음의 순교자 같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주의 날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주의 날은 즉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교회 휴거 후에 온다고 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박해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의 날이 되겠지요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맞으러 공중에 오시는 그 휴거는 지나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20세기에 순교자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20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날이 왔습니까?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후서에는 그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배교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박해시대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은 자들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도 주를 맞으러 공중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전서 4장 후반에 이것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가지 이유를 가지고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습니다. 박해가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께 견고히 붙어있으므로 바울은 이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1장은 그들이 누구를 믿었는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3장에서는 그들은 무엇을 믿었는지, 어떻게 믿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진리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왜 이것을 믿었습니까? 물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온 하나님의 종들의 행동을 보고 옳거니 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거룩한 삶을 보였습니다. 어떤 위선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매일의 생활은 분명했습니다. 주변의 철학자들이 선생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일군들은 데살로니가에 가서 자기들의 유익을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자들의 행동은 분명하게 옳았습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말도 옳다’ 그래서 믿었습니다. 전서에 두 번 정도 이와 같은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4,5장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해서 믿었습니까? 특히 4장 전반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4 1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너희들이 받은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더욱 많이 그렇게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 믿는 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전해준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여러분과 저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이와 같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순종이라는 것은 참으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순종하여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 속에 분명한 것은 주제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입니다. 각 장에서 재림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9,10절에서는 이 재림이 구원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1 10절에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오실 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노하심이라는 것은 환난시대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하늘로 불려 올라간 후에 7년이라는 환난기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밤 시간이 없어 구체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 9장에 분명히 예언되었습니다. 거기는 69이레에 관한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한 이레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69이레가 지났습니다. 그 날짜를 계산하고 싶으면 69이레 곱하기해서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483년이 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483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다니엘 9장에 있는 한 이레 즉 7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7년은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환난기간 중 약 반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심한 심판을 행하십니다.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3년 반 동안에 세계인구의 약 3분의 1이 죽습니다. 심하디 심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래 노하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장래 노하심을 기다리십니까?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신다고 되어있습니다. 노하심 그 자체에서 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노하심에 들어간 다음에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노하심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서 1장의 주님의 재림과의 관계입니다. 구원과 관련되어 있지요!

2장과 관계된 재림은 섬김과 관계된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충성된 종들은 그 상급으로 면류관을 받습니다. 2 19,20절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생활과 관련됩니다. 3 13절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4장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의 슬픔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묻혀있는 무덤 옆에 서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슬픈 마음이 들 것입니다. 바울은 4장에 있는 것처럼 소망없는 이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소망이 없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면 믿은 가운데서 돌아가신 분들은 부활합니다. 우리들은 부활한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려 올려집니다. 이 말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5장의 주님의 재림은 또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강입니다. 5 23절에 따르면 우리들 전체 즉 영, , 몸이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재림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가지 있습니다만 이 1장 안에서 셋으로 구분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1~4절까지는 데살로니가의 믿는 자들의 과거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1 1~4절까지는 그들의 과거, 5~8절까지는 현재, 그들이 현재에는 어떤 것을 행했습니까? 그들은 넓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사는 전 지역과 그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9,10절에서는 그들의 소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미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들은 열심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먼저 버렸습니다. 다음은 그들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에는 승리라고 하는 것도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전서가 우리들에게 권면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만약 장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섬깁시다. 고맙습니다.

2006 10 14 부산 명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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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