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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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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말씀을 교제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모임에 오게 된 것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알도록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밤에는 구약성경의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37장과 38장에서 몇 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37 15~20

15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사야 38 1~8

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여기에는 히스기야 왕의 두 기도가 있습니다. 한 기도는 앗수르 왕이 보낸 사람인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두번째 기도는 감사의 노래가 든 기도였습니다. 자기가 산헤립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병으로부터도 건짐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구분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실제덕인 구분입니다. 왕과 나라가 고난을 맞이했을 때였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많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5~38장은 미래에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이사야서 전체가 예언과 관계가 있겠습니까? 물론 매우 흥미로운 관계가 있는데 그것을 좀 상고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이사야서에는 큰 두 구분이 있습니다. 1장부터 39장까지입니다. 그리고 40장부터 66장까지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성경 전체가 닮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66권이 있습니다.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39권과 27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그와 꼭 닮았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이런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야서 전반과 후반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저자가 기록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여러분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소유성경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제 곧 이사야서의 위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특징적인 것은 이사야서 안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이 이사야서 전체에서 25번 나옵니다. 이사야서 외에는 전체 합쳐서 4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이 이사야서 전반에 12번씩 나와 있습니다. 전반에 12, 후반에 13번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서 전체의 특징적인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사야서는 신약성경에서 약 21번 인용이 되었습니다. 전반부분이 신약에 10번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후반은 신약에 11번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전후반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저자가 기록한 것이지 두 사람의 저자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사야서를 두 사람이 기록했다면 이사야서 전체를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이사야서에서 몇 번 인용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은 전반과 후반을 나누어서 인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이사야서의 인용을 통해서 아는 것은 전반과 후반을 공통으로 인용함으로써 전체가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일 것입니다. 왜 이사야서가 이렇게 해서 기록이 되었겠습니까? 그 목적은 두 개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모두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시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절대로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해서 이 두가지가 가르쳐지고 있겠습니까? 한가운데 있는 히스기야 왕과 관련된 장에서 이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사야서가 성취된다는 가장 큰 확신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히스기야에게 많은 예언이 주어졌는데 특히 세가지 예언이 주어졌습니다. 이 세가지 예언은 곧바로 성취되어야 하는 예언이었습니다. 히스기야에 관한 것, 히스기야가 사는 그 동네에 관한 것, 그리고 히스기야의 대적에 관한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아주 강력한 앗수르왕 산헤립이 이스라엘로 공격해왔습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대로 히스기야는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산헤립이 강력하다는 것을 히스기야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산헤립이 아무리 강력한 왕이라도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벽으로 얼굴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다시 왕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에게 너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질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짧은 동안의 예언이 분명히 이루어졌다면 나머지 예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언에 대한 것은 이사야 7,9장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7장을 보면 남자아이가 태어난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말입니다. 그는 앞으로 전 우주의 왕으로 나타날 사람이었습니다. 이보다도 놀라운 예언 이 있습니다. 그것은 53장에 있는 유명한 것입니다.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에는 그들의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대적을 모두 쳐부수고 이 분의 옷이 피투성이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36~39장의 말씀이 성취됐다면 나머지 말씀도 성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그들과 전 인류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분이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오셔야 할 분이라는 것도 알아야 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더 크고 큰 예언도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매우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믿는 자보다 더 큰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구약 사람들은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에 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히스기야에게 이루어진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처녀의 몸에서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순한 종으로서 그분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40,41,50장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또한 이분이 사망으로 사망을 이길 것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모든 예언이 이런 식으로 예언된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보다도 마땅히 인정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예언들이 성취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앞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예언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미래인데 분명히 나타나시겠습니까? 이미 예언이 성취되었던 것처럼 미래에도 성취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심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가까이일지 멀지는 모릅니다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 자세하게는 요한 계시록에 영광의 재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어떠하든지 간에 성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예언을 기다리면서 히스기야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4개의 장이 어떤 의미인지 간단한 이 방법을 통해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36,7,8,9 이 네 장은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3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왕하 18 13~21, 역대하 32,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에 관한 기록이 3번 기록되어있습니다. 읽어보면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이 같은 사건을 여러 번 다루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주의를 이와 같이 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황제나 왕들이 아무리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의 예언을 헛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벨사살, 그리고 산헤립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이사야서의 전반부의 대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1장부터 6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을 봐도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1~6장까지 이스라엘의 죄가 크게 들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왕이 죽을 때 이사야가 선지자로 공식적으로 들어났습니다. 웃시야가 죽던 그 해에 이사야는 그룹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심판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고 하나님께서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사명은 복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말에 관하여 실제로는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보고 이사야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나타냄이었습니다.

7~12장에는 소망에 관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7장에는 처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나는 말씀이 나옵니다. 9장에 나오는 그 한 아기는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12장에는 이사야가 대표로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라는 말씀으로 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소망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13~35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나와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를 끼친 이방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의 9가지 선고가 내려져 있습니다. 선고라는 것은 그 각각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중한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의 번역에 따르면 그 선고를 모덴이라고 하는 지명이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이방 왕들에게 가는 그 선지자들에게는 대단히 무거운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은 심판을 말씀할 때 그 무게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러한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선고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말한 선고라는 것은 심판에 대한 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1~35장가지 말씀드린 이런 것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서 전반과 후반 가운데 끼어들어 있는 것이 히스기야에 대한 4개의 장()인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시험받는 히스기야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렇게 어려울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히스기야라는 인물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열왕기하 18장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성공을 한 듯 합니다. 그의 충성스러움과 경건은 한가지 일로 드러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남겨진 놋뱀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서 그의 태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놋뱀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영적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만나를 그들은 경멸했습니다.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숙영지에 불뱀을 보냈습니다. 여기에 물린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중재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았습니다. 진 어디에 있던지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나았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이 일을 실례로 말씀하셨습니다. 놋뱀은 복음의 놀라운 실례 중에 하나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받는다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능력은 그 놋뱀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시험하셨습니다. 낫게 하는 것을 말씀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시대 즈음에는 그 놋뱀이 우상처럼 되었습니다. 놋뱀에 능력이 있다고 믿은 듯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뱀에 매우 흥미를 가진 듯 합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그 놋뱀을 부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경멸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히스기야는 그러한 성격의 인물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히스기야와 같은 형제와 자매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절대로 하나님 안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느끼면서 그 가운데서 행하는 형제자매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성경에 들지 않은 것은 담대히 부인하는 그러한 형제 자매들이 확실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히스기야 시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산헤립은 많은 군사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해오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여기에 대항해 싸울 능력이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현실로서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은 이미 산헤립에게 점령을 당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차례일 것입니다. 그 어려운 환난의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서두에 읽었던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희들은 곤란합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거민들은 주님 당신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거민이 다른 나라처럼 점령을 당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이방 신들과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주여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들을 돌봐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때 산헤립과 그가 보낸 사자들이 매우 모욕을 당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용납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이전에는 복음을 전해서 많이 구원받은 나라들이 지금 현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지금의 미국, 캐나다,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만연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외에도 아무 종교도 괜찮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저의 고향인 캐나다도 그러합니다. 2년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나운서가 말하기를 전도자들은 세계의 쓰레기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시대는 히스기야의 시대와 영적으로 닮았습니다.

이때에 히스기야에게는 세 개의 대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산헤립과 그 사자들이며 그들은 직접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동일한 대적을 대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너희 대적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산헤립은 앞으로 올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듯합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무엇이든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삼킬 자를 찾는 우는 사자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은 36,37장에 있는 일입니다.

38장에는 히스기야의 병이 히스기야의 약점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산헤립이 침공해온 같은 해였습니다. 이것은 육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면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육이라고 하는 연약한 부분을 대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육의 욕망으로 헤맬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세번째는 앗시리아 사람들의 교활함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와서 히스기야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교활합니다. 그들이 히스기야의 친구가 되고자 한 것은 히스기야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한 방법인 히스기야와 그 백성을 공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닮았습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이 세상과 벗이 된다면 하나님과 벗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세상은 무엇을 하기를 원합니까? 그 세상 모습으로 우리들을 집어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세상과 같은 모양으로 생활해가기를 세상은 우리들에게 권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찬성하는 교회들은 매우 인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은 세상과 분리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나 가정적인 끝남이 아니고 또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대적이 셋입니다. 사단과 육과 세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 히스기야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산헤립과 전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부하들에게 전혀 대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산헤립이 하는 말을 무시하고 신경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혀 대응하지 말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단을 두려워하지 말고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사단을 대적하면 그가 도망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히스기야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이사야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 각자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라고. 바울은 그것을 잘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모든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자신도 직접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자신을 위해서 직접기도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의 대적을 무시해 버리고 형제자매들의 기도와 자기 자신이 직접 기도로 하나님의 건짐과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은 보존되었습니다. 대적이 파멸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그래서 두번째 기도는 감사의 찬송과 같은 기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실망스런 상태였습니다. 마지막에는 건짐 받고 기뻐하는 그들이 되었습니다. 38 19,20절입니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여기에 축복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그 민족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은 조금 쓸쓸한 유감스러운 면이 또 있습니다. 역대하 32 25절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큰일입니다.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않았기 때문에 교만해졌고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의 말을 하였습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자기가 강하게 서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교활한 앗시리아 사람들이 왔을 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가 사용하고 잇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보물과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모든 보물을 그 교활한 자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교만해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위대함을 보시오. 나의 굉장한 보물을 보시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히스기야 네가 앗시리아 왕에게 무엇을 보였느냐?고 묻습니다. 히스기야는 집에 보물 모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보물을 네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감스럽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했었습니다. 그 생애 마지막에는 교만 때문에 큰 실패를 그만 해버렸습니다. 분명히 우리들에게는 경계의 말씀, 교훈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이외는 아닙니다. 히스기야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받는다면 복이 되겠습니다.

2006 10 12 여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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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