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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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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에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전체를 보겠습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2,3개월이 지난 후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후에 많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 도시에서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하더라고 분명하게 믿음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이 화제가 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상태를 염려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로 와서 그들이 믿음에 견고하고 바울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바울에게 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보신대로 바울은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썼습니다. 또한 재림에 관한 착각을 고치기 위해서 편지를 섰습니다. 먼저 1장에서 그들의 과거에 대해서 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받은 것을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알아서 행합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의 현재의 삶에 대한 입장도 말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것에 대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가지 말을 전했습니다.

첫번째 이들은 바울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나팔을 부는 자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주변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모본이 되었습니다. 본받는다는 말은 연극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무대에서 연극배우가 흉내를 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뒤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배우의 말이나 동작을 보고 연구합니다. 무엇 때문에 연구합니까? 그 유명한 배우가 못나오는 경우를 대비해서 옆에 있는 배우가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그 배우의 흉내를 내는(본받는) 것이지요. 그 배우를 보고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트럼펫을 가지고 울리는 것처럼, 악기 가운데 트럼펫은 높은 소리를 내는 악기일 것입니다. 바울은 악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음악 분야에서 이 악기를 고른 것으로 보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트럼펫을 부는 것처럼 마치 복음을 잘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었습니다. 마치 조각하는 사람들이 본을 드는 것처럼 말이죠. 조각을 하게 되면 어떤 본을 보고 조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조각을 하는 사람이 조각의 원형을 보고 조각하는 것처럼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은 이와 같이 기술분야에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서 이와 같은 것들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본을 또한 받아야 될 것입니다. 전달할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휘들을 잘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 행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입니다. 모본을 받아야 될 사람들, 큰 목소리로 공표한 사람들, 주변 믿는 사람들의 모본이 된 사람들, 왜 그렇게 됐습니까? 그들의 소망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 9,10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면 그들을 본받아야 될 것입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2장으로 들어가면 한가지 사실이 금방 분명해집니다. 1 2,3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이 말씀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바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에는 이것이 더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 5절에도 2장과 관련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특히 5절 후반을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2장에서는 바울은 그들이 행한 것들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5절에 말한 것처럼 이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냥 말 잘하는 프로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웅변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웅변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반복했습니다. 이것은 디도서 2 10절과 같은 내용의 말씀대로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만큼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태도와 행동은 중요합니다. 만약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순종하고 있지 않다면 참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말씀 전하는 자의 행동을 보고 그 말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경건한 삶을 가지고 그 말씀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그저 말씀전하는 자들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디도서 2 10절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가지고 우리자신을 꾸며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매우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한국에서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매우 복된 소리입니다. 이 복음이 믿는 자들의 경건한 삶으로 꾸며져야 합니다. 그래서 2장으로 들어가면 말하는 자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2 2절에 있는 것처럼 많은 고난과 능욕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신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큰 고난 가운데서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능욕을 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박해 때문에 얼마되지 않아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베레아에서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도망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약속하셨지요! 만약 세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다면 그분의 제자들도 핍박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핍박합니다. 우리들의 복음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 경우에 바울을 본 받아야 합니다.

3~6절까지 바울의 동역자들의 성실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3절에 의하면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진실한 것만 말했습니다. 이것은 간사나 궤계가 아닙니다. 오늘날에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당신의 문제가 다 날아가버립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떤 경우는 믿고 나서 문제가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말로서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어려움뿐이 아니라 속에서도 어려움이 나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다가오는 날에 이긴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4절에 보면 바울의 동기가 매우 깨끗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큰 집회장소를 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이와 같이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곳에서 그렇게 합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섬김 속에 이런 목적이 없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 움직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든지 기뻐하지 않던지 말이죠.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람들을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거짓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하나님의 종들의 말하는 방식은 어땠습니까? 5절에 있는 것처럼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6절에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주장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영광이나 갈채를 받지 않았습니다. 자주 일컬어집니다만 세상이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때 주의하십시오. 경건하게 하나님을 따라가는 자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이 사도들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토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임에서도 같은 법칙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앞에 나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이 경건한지 아닌지를 시험해 봐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집사들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들은 어떤지 시험해본 후에 그들에게 일을 맡길 것을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임을 보고 ‘아 여기에는 지도자가 없구나’ 하면서 자기가 지도자가 되려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시험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집사인 경우는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집사들은 종종 모임의 헌금을 다룹니다. 정직하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 받은 이후에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난 이후에 인정됨으로써 하나님께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명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들은 매우 신실하게 그 사명을 성취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에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조금도 아첨의 말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큰 자들로서 믿는 자들을 섬겼습니다. 믿는 자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했습니다. 아무런 책망할 것이 없는 순전한 형제님들이었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돌보았습니다. 11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했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교만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전혀 반대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그저 전했습니다. 그들이 그저 말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위해서 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쓰기를 원했습니다. 마치 유모가 자기 자녀를 안고 섬긴 것처럼. 엄숙하게 자기 자녀를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처럼 경계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서 전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많은 교회에서는 위에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 교회 있는 무리들을 ‘나의 무리’라고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모임에서 믿는 자들이 그 모임의 장로, 집사들의 무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무리들인 것입니다. 사도(사자)들은 종들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밑에서 모임의 하는 분들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장에 있는 것처럼 ‘너희 중에서 다스리고 수고하는 자들을 알고’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무리를 양육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모임이 생기면 바로 그 모임에 하나님의 무리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디모데전서 3장 초반은 이것을 잘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리들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무리들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으로만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무리를 양육하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물건도 어쩌면 사용해 버리게 될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까지 부인과 자녀들은 불쌍해집니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던 희생을 치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성령이 하나님의 무리를 돌보는 희생을 치루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베드로전서 5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특별하게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그 동역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위해서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그 자신은 놀랄만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생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끊임없이 믿는 자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모임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2 10절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이 나옵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사도와 동역자들은 그들 가운데 교제할 때에 바깥에서 볼 때에 아무런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행동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 없으면 안됩니다. 모임의 인도자들이 책망할 것이 없다면 모임은 그로 인해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유감스럽스럽습니다. 모임에서 그 형제들에 대한 평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모임에서 평판이 나쁘면 인도자로 인정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지 않는 외인이 나쁘게 평판해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본래부터 옳은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임 안에서는 좋은 자처럼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장사할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며 모임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은 여러분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장로나 집사 된 사람에게 그 주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복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장에 또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19,20절입니다. 이것도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히브리서 13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교회 장로는 자기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모임의 장부를 보고해야 하는 사람처럼 나와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눈에 띄고 두드러지기 위해서 장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세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짚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모임 안에 집사나 장로나 또한 일군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은 경건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임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임에 있는 형제자매님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에 따르면 그 장로들의 하는 일을 잘 보고 인정하며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장로들은 모임에서 독재자가 아닙니다. 장로들이 명령하면 ‘예’하고 따라가는 것을 좋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앞서서 모본을 보이고 다른 형제 자매들은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부인은 먼저 자기가 주님을 순종하는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주님 앞에 짚고 갈 때에 슬픈 일은 없을 것이며 매우 즐거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의 면류관이 무엇이냐?’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모본적으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격려의 말을 가지고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말로 권면을 받는 것입니다. 2장에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에 들어가면 그들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음시간에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6 10 15 부산 명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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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