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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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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의 개략)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종으로서 복된 일입니다. 한국에 이렇게 올 수 있어서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는 마태복음부터 저희들이 시작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시작입니다. 신약성경을 전체를 보고 싶으면 마태복음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4권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왕으로 주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주님의 완전한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을 완전한 인자로서 인생으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주님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예수님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것을 교제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의 힘(에너지)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주님이 쉬시는 것이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바쁘게 섬기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의 동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곤란을 당한 여자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각 복음서에는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어제에 이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 16~24절입니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태복음은 분명하게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15,6번 정도 인용한 곳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들의 하신 말씀을 이루니라는 말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왕으로 소개된 그분을 마태복음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아마 로마인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의 능력, 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힘이라는 것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정치적인 힘을 비롯해서 누가복음은 틀림없이 그리스인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문화나 교육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스인들의 많은 사람들은 완전한 철학자 또는 완전한 선생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주 예수님이 완전한 인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과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이 바라는 그 최고의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성취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안에는 세상 또는 세계라는 말리 자주 나옵니다. 1장에 의하면 주님은 이 세상에 계셨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또 다른 곳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말도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증거했습니다. 분명하게 요한복음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인 우리들은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자세히 생각을 해 봅시다. 이 복음서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도 소개를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만 주목해 보겠습니다. 1장에는 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 불리우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윗입니다. 다윗 왕을 낳으니라. 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1장에는 14대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였습니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 할 때까지 14대였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이거 하여서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 왕국이 성립하기까지 14, 다윗 왕 때에 왕국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 할 때까지 14대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왕국을 상실할 때까지 14대가 걸렸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이거 하여서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왕국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데 14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1장 속에 쓰여졌습니다. 1장은 예수님의 세계 즉 계보가 나와있습니다. 주님의 계보와 그 탄생입니다. 우리는 계보를 읽으면 재미가 없다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만 가득 나옵니다.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계보 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나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께서 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주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오도록 그 후손들을 나오도록 복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계보 속에는 여자의 이름이 또한 나옵니다. 여자 중에 가나안 여자가 두 사람 있습니다. 모압 여인이 또한 한 사람 있습니다. 또한 헷 사람도 한 사람 있습니다. 물론 나쁜 짓을 한 여자도 있습니다. 여자들은 그리스도의 계보에 나타날 자격이 없습니다. 외국여자입니다. 또한 간음한 여자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때 여자로 여리고성의 라합이라는 여자도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별도지만 다른 여자들은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물론 아무도 자격이 없습니다. 은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계보를 보면 실제적으로 어떤 왕들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왜 어떤 왕들은 이름이 쓰여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익을 행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이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아주 사치스럽게 사람을 축복하신 것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독생자를 주신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마리아의 아들로 지금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예수라고 붙여졌습니다. 여호와는 구원하시는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계보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읽으면 여러가지 의미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에 대한 각각 여덟 개의 타이틀이 나옵니다. 1 21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시지만 사람이 되셨습니다. 1 16절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력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십니다. 이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할 분이셨습니다. 1 1절에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왕위를 잇는 왕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1 1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예수님의 품격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6절에서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자 즉 지배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이 지정자 가장 높은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이 면에서 보면 아무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두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좀 다릅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들과 자녀라는 두 종류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는 출생으로 말미암아 되는 자녀라는 의미가 있고 우리들은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출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 예수님에 대해서는 한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계보를 따라 주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9장에는 한 아들을 주신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두번째 자녀라는 의미는 재미있습니다. 두번째 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버지와 동등한 자격과 자질을 가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늘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잠언 30 1~3절까지 보시면 창조자의 이름을 네가 아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네가 아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마태복음 안에서 아주 강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 2절부터 16절까지는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하는 말로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15절까지 동일한 형태로 낳고, 낳고, 낳고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16절의 주님의 경우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아버지에게서 낳은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나와 있는 동사는 능동태인데 여기 있는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물론 여기는 요셉의 힘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도 힘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대로 너로부터 나올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계보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16절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는 여성적인 문법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이 말은 남자에게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말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처녀 출생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예수님이 왕으로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소개 되었는데 그리스도에게 왕의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까?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까지 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실패했습니다. 그 왕 중에는 실패하지 않은 왕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실패한 왕 중에 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실패가 있었습니까? 마태복음은 이것을 잘 설명하는 곳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주 예수님이 4가지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계보로 말미암아 소개되었습니다. 탄생의 성질로 말미암아 소개되었습니다. 침례를 받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4장에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므로 소개되었습니다. 물론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소개되는 곳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말이죠. 처음은 계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주님이 분명히 자격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까지 이스라엘의 왕위가 이어져 왔다면 요셉은 왕세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람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계보로 보면 다윗부터 요셉까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왕세자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 왕위에 앉으실 자격이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2장에는 또 다른 자격이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박사들이 주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왔기 때문에 주님은 다른 나라를 다스릴 자격도 있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박사들은 이방인의 대표자처럼 보았습니다. 그들은 엎드려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종에서 전 세계를 다스릴 자격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장에서는 주님의 자격이 다른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증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 위에다가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말씀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이분은 틀림없이 왕좌에 앉아야 할 분이셨습니다.

4장은 어떻습니까? 4장은 도덕적인 자격입니다.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것이 불가능하십니다. 주님은 태 내에서부터 거룩한 자라고 선언되셨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다는 것과 죄가 없다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에덴동산의 아담은 죄를 범하기 전에 무죄했습니다. 하와로부터 열매를 받아먹기 전까지는 아무 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역시 자유로운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악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담은 그때까지 무죄했지만 거룩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죄를 범할 수 없다면 이 유혹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죄를 범할 수 없다면 이 유혹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조금 기다리십시오. 구약성경 출애굽기 12장을 기억하십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각 가정은 각 가정의 식구에 맞추어서 한 마리 어린양을 골랐습니다. 그 달 열흘에 잡았다가 14일 날 밤에. 14일에 잡는데 왜 열흘에 어린양을 붙잡아 놓겠습니까? 무슨 조건으로 어린양을 골랐습니까? 이 어린양에는 흠이 없기 때문에 골랐습니다. 14일까지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10일에서 14일까지 놓아두는 것은 흠이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조사해봐서 흠이 없다고 판정을 했습니다. 14일까지 놓아두는 것은 흠이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지 조사하기 위해 놓아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을 통해서 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지 가능성의 여부를 조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 죄를 범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증거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대로 너로부터 날 자는 거룩한 자라 일컬을 것이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의 주님은 죄를 범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관점에서, 세계 여러 나라라는 관점에서, 하늘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왕좌에 앉을 자격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4장까지는 왕이 소개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왕이십니까! 우리들은 미래에 이 분의 지배에 참여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에는 마태복음의 대략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자그마한 충고를 하나 드립니다. 성경을 보실 때 66권에 각 권의 대의를 먼저 봐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로마서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로마서 1장이 조금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1장은 대자연을 다룬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왜 대자연에 대한 것을 다루었습니까?하는 생각의 질문이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안다면 1장이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압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교리적으로 즉 가르침적으로 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에 의하면 이방인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체로 죄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자연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치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변명은 없습니다. 대 우주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점점 더 죄악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죄가 깊은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다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죄가 깊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방인들은 종교가 있던 없던 죄인들입니다. 죄로 정죄하셨다. 로마서 3장에 들어가면 바울의 말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했고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유죄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됩니까? 의의 토대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원해 주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양쪽 다 죄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4장입니다. 5장에 들어가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화목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6,7,8장은 믿음으로 말미아마 의롭게 된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6장에서 성별되었습니다. 7장에는 죄가 우리 속에 있는 것 같은 육체가 나타나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천국 갈 때까지 죄라는 원칙이 우리 속에서 역사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또 하나님께 거룩하다는 부름을 받았지만 말이죠. 성별되어 있지만 속에서는 죄의 원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 들어가면 우리 속에서 움직이는 죄의 원칙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를 범할 자유를 거절할 자유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할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1장부터 8장까지 있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9,10,1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역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9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옛날에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0장에 의하면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선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11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 12장부터 15장까지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알고 나면 로마서 내에 있는 자세한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에서 전후 관계를 통해서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왕을 소개하고 5장부터 7장까지는 왕의 단언이고 5,6,7장은 산상수훈이라고 들으셨을 줄 압니다. 많은 목사들은 여러분이 마태복음 5,6,7장을 순종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나중에 천천히 읽어 봐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우연히 제자들에게 말한 것을 들은 것처럼 보입니다. 산상수훈의 의미는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왕국의 속한 자들은 이렇게 행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역시 왕이 부재중입니다. 왕이 부재중인 나라에서 그 왕의 국민들은 어떻게 행해야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5,6,7장의 가르침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제 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의 한 분이십니까?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5,6,7장의 말씀대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왕은 부재중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밤은 마태복음 5,6,7장은 자세히 못 보겠습니다만 내일 다시 보겠습니다.

8,9,10장에 관한 구분입니다만 여기서는 왕께서 그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십니다. 어떻게 그 권력을 나타내십니까? 몇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몸은 낫게 했습니다. 또한 자연을 다스렸습니다. 도는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육체적인 세계, 또한 물질적인 세계, 또한 영적인 세계도 주님이 권력을 가지고 계심을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8,9,10장의 의미입니다.

또한 11,12장에 들어가면 놀라운 것이 나옵니다. 이 그리스도에게는 자격이 있으시지요? 그분의 단언(斷言)에 의하면 왕국의 규칙은 분명하고 엄위한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왕국이지요. 또한 모든 면에서 주님이 충분히 능력이 있는 것이 증명이 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1,12장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서 유대인들이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바알세불이 지폈다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음 더러운 영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통에 주님은 더러운 악령의 왕으로서 능력을 행했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의 능력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죄 용서가 없습니다. 왜 죄 용서가 없었습니까? 유일한 죄의 방법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6,10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의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입니다. 배교, 배신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마태복음 12 28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28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개인개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국민으로서 왕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번에는 개인개인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개인개인을 부르셨습니다. 11,12장이 끝나면 마태복음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됩니다.

13장부터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왕의 설명이 따르고 있습니다. 13장에는 7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씨뿌리는 비유부터 시작을 했지요. 바다에 그물을 치는 것으로 비유가 끝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씨를 뿌리고 계셨습니다. 왕국의 말씀을 가지고 뿌리셨습니다.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는 것은 천년왕국 바로 들어가기 직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거절한 이후부터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주님이 공중에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일곱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14~18장의 말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왕의 계시입니다.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16장에서 교회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금 시대 제자들을 위해서도 18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18장은 지역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역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우연히 가르쳐진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 계획의 분명한 일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십니다. 물론 구원받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몸된교회의 한 지체가 됩니다. 왕이 부재중인 가운데서 지역교회가 왕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조금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의 통일성, 마태복음이 일치되고 있는 면을 아시겠습니까?

19~23장에서 주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 나타나십니다. 이번에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십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두번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주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주님에 대해서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인정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했습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때 그들은 스가랴서를 기억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 전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24,25장에서는 미래에 관한 일을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광가운데 오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곳을 통해서 미래에 관해 주님이 자세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에게는 이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몰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6,7,8은 바로 이 기록입니다. 마지막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지막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계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마태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놀라운 왕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을 처음을 볼 때 시편 45 11절이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45 11절은 내일 떡 뗄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집회에 아주 적당한 말씀이 아닙니까? 내일 아침 우리가 모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왕이시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2002 1 19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