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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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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9. 05:19 횃불/2001년

십 자 가

한 봉 래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9:31,3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며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대신 피 흘리고 죽으셨다고.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누리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산다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은 무슨 어려운 용어로 된 말이 아닙니다. 심오한 추상적 문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안되면 그 의미를 선생님인 예수님께 물으면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묻기도 무서워했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들으셨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동일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평범하게, 나름대로, 그런 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당신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때 불쾌하며, 마음에 거부감이 듭니다. 복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마음이 합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그 말에, 그 내용에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을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멸망에서, 이 저주에서 당신의 힘으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그렇게 무능한가? 내가 여태껏 모든 일들을 그 나름대로 감당해 오지 않았는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성취해 왔는데···· 공부, 가정, 사업, 인간관계를 맺어왔는데····내 힘으로 하늘나라에는 갈 수 없다고?”라고 당신은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자에게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사용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고전 2:4,5).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람의 논리로 설득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도 아니며,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종교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종교를 만드는 목적 중 하나는 많은 신도를 모으는 것일 겁니다. 많은 사람이 그 종교를 받아들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교가 이런 내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으로 절대로 우리와 같은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전도하지만 내 능력으로 당신을 회원으로 만들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종교가 있겠습니까? 그런 종교가 성공하겠습니까? 아마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 복음,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이 복음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말씀이며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4~28).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몰려와 물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말씀하시지 말고 또 애매하게 말씀하시지 말고 확실히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확실히 믿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아직 미진한 게 있어서 믿음이 생기지 않으며, 분명하면 믿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분명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분명한 이해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복음은 미련한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신은 증거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불신은 외적인 증거 즉 기적 같은 것을 보면 없어지고 믿음이 생길 것으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라고 내 귀에 분명히 들리면 정말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에 불과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의 믿지 못하는 마음, 복음에 대한 불쾌감, 거부감은 믿음에 의해서만 치료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말하였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어떻게 오는 걸까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 중 사람은 연약하지만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힘으로 치자면 코끼리만 하겠습니까? 용맹으로 해도 사자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의 뛰어남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사람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왜 일까요? 힘도 용기도 아닙니다. 단지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사고능력으로 이루어낸 수 많은 업적들을 보십시오.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미국에서 화성 탐사선을 쏘아 올렸습니다. 그 탐사선이 화성에 도착했습니다. 그 탐사선을 이 지구에서 조작합니다. 화성 표면의 성분과 온도 등등을 여기서 조작해서 시험, 분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또 복제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양의 세포 가운데 하나를 이용해서 양 한 마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아마 똑같은 양을 수 없이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포는 현미경 없이는 볼 수 없는 작은 세계입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세계를 사람들은 그 지혜로 알아내고 조작하고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주, 자연 등 이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성공적인 사람의 사고가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떠합니까? 소위 종교라고 부르는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어리석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묻지도 아니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첨단과학시설, 연구소 같은 건물을 짓습니다. 그리고 나서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돼지 머리를 놓고 지내는 고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위대한 사람이, 그 위대한 정신의 산물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놓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음식 앞에서 절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을 향해 위대한 당신도, 이 놀라운 업적을 쌓은 사람도 죽어야 되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 명의 병자가 대표적으로 나옵니다. 첫 번 병자는 38년 동안 앓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무능력자입니다( 5). 그리고 두 번째가 소경입니다( 9).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나사로)이 나옵니다( 11). 다시 말하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우선 무능력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구원,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생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소경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은혜를 깨달을 수도 없는 소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말씀이 전해져도 반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묻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혹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기는커녕 마음속에 거부감과 불쾌감이 드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가 유독 하나님과 관련되어서는 그렇게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탐구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과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복음은 사람에게 계속 미련한 것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기에, 깨닫기에, 이해하기에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20).

하나님이 그토록 지혜로운 사람에게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사람의 지혜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허무감을 해결해 주던가요? 사람의 사상이 양심의 가책을 해결해 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내 지혜가 내 인생을 참되게 인도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에 있어서 좌절을 느낀 사람, 자신의 지혜의 부족함을 느낀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자기 지혜로 모든 다른 영역에서 성공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과 관련되어서는 무력하게 만드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우상과 참되신 하나님과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미신과 진정한 믿음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찾으면 사람은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이 숨어있는 분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만나주시는 것이 됩니다. 즉 사람이 의롭고 하나님이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옳고 사람이 틀려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면, 사람이 행동하고 하나님은 대상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사고의 재료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난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법정에 서서 자기의 존재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람과 달리 전능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하나님이려면 내 눈앞에서 놀라운 능력을 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적을 행하면 하나님으로 믿겠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헬라인은 하나님을 전지(全知)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모순들을 다 대답해 주는 분을 원합니다. 하나님, 성경, 인생, 자연에 대한 여러 수수께끼를 다 대답해 주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과 지혜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가지고 나오며(이들이 유대인, 즉 종교인들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합니다(이들이 헬라인, 즉 세속적 지성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제시합니다. 그 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이 미련한 복음, 사람의 이성으로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복음 앞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개념과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멸망 당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에 대해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부르십니다. 미련한 복음을 통해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10:17).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서 기적처럼 생기는 것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탐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가 아닌, 어린아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연구해서 발견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을 힘입고, 그분의 은혜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이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약하게 된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될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명예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죽다니요! 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 사람 보기엔 미련해 보여도 지혜로운 사람보다 더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8:3~9).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군사들, 하속들과 함께 옵니다. 한 밤중이라 예수님을 몰라볼 수 있으므로 횃불을 들고 그 제자인 유다를 앞세워 체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게서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10:18). 예수님은 스스로 잡혀 주십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잡혀주지 않는다면 그분에게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피 흘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분을 죽일 수 없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체포되는 장면에서도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군인들은 횃불, , 칼을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반항하거나 도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이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예수님이 먼저 나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질문하는 이 분이 자신들이 체포하려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오히려 수동적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다그리고 이 말을 할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실 때 쓰신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3:14)와 같은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너희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뜻과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동시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엄이 드러날 때 사람들이, 죄인들이, 피조물이 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겨우 정신을 차린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한번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다시 한번 이들은 수동적으로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는다면 나의 제자들은 보내줘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된 후 도망갑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망가면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것은 내 발이 빨라서도, 운이 좋아서도, 군사들이 봐줘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내가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불러낼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분이 지금도 한마디만 하시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그분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사람의 손에 잡히십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의 지혜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미련함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7,8).

사람들 사이에도 아름다운 사랑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대신 목숨을 버린 어머니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든 축복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원수들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믿을 것인지 보장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이 어리석은 죽음, 이것이 하나님의 미련함입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27:27~37).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한 이 장면을 기도하시는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놀라운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함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들 하나 하나는 엄청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의 옷이 찢겨지고 벗겨졌습니다.

이 예수님의 약하심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손과 발은 못 박혀 있습니다. 이제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되어 버렸습니다. 이 손이 어떤 손입니까? 병자들 위에 얹던 손입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셨던 그 손입니다. 그리고 발은 어떤 발입니까? 죄인들을 찾아가셨던 그 발입니다. 이제 그 손과 발이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손대지 아니하고, 발로 찾아가지 아니하고도, 이제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진정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누구십니까? 모든 입술이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낮아지셔서 십자가의 모욕,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서 높아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목이 마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비를 내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물이 있으라하시니 물이 생겼던 그분께서 목마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갈증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분께서 죽음을 맛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죽어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약하심을, 미련하심을 보십시오.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지혜로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뿐입니다.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인 내가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의인이 되기 위해 예수님 이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3)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셨습니다. 이제 율법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해라, 하지 말라하는 성경의 모든 법이 우리를 건드릴 수도, 정죄할 수도, 죄인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대가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예수님은 대신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온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홀려졌기 때문에, 양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비난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래서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양심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까지 그리스도의 피가 해결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26:19).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생애를 간증합니다. 자기 쪽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가던 그가 이제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순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따라갈 뿐이라고 왕 앞에서 당당히 말합니다. 이것이 그 위대한 사도의 삶을 낳은 비결이자, 전환점입니다. 당신도 이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2001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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