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
월리암 켈리 지음/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지금까지 상고해온 로마서 가운데,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최고의 광채를 발합니다. 이 구절은 믿는 우리가 가장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즐거워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에 있음을 개인적으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결코 가능하지도 않으며,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굳건한 평안을 누리는 것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약의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오늘날도 여전히 복되게 믿는 자에게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바라고 믿었던 것을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그 성취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사함과 우리 양심을 정결케 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단번에 영원히 성취된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사실을 무효화할 수도, 그 위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죄인된 우리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 은혜의 자원이 있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흠정역에서는 ‘속죄’로 되어있음)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확증하여 나타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힘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조금이라도 경건하게 된 후에 있었던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을 멸시하는 사람은 얼마나 악합니까?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리를 입증하셨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멸망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겁을 내는 대신에 우리는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실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지상의 복락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신령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환난을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데, 우리는 환난을 통해 자기 의지(자아)를 깨뜨리고,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또 어떤 분인지 알고 배우게 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고, 또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도 없을 때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딴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나타났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는 순간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장차 오는 진노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보증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면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미래에 대해 더 큰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흠정역에는 ‘atonement’)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혹은 ‘자랑하느니라’)” 이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이지, 구원받기 전처럼 무서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또한 그날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따라 상급을 주실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았으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분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했던 길에서 경험했던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닫게 해주었으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구주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날마다 경험을 통해 확증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 일은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시며,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심을 빛보다 더 밝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는 부정한 감추인 것들을 포기하게 되며, 더 이상 내 생각대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만적으로 다루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악한 방법에 의해서는 참된 구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담을 쌓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이 땅에 임할 진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고, 우리가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함이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 우상이 제거되었고, 이제 살아있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이 있는데, 곧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그리스도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끌림을 받게 되었고, 우리를 완전하고 변함없는 은혜 가운데 두신 하나님께 온전히 찬송이 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히브리서 12장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는 증거이며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목”의 결과로써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을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화목”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가 기뻐하고 즐거워한 탕자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한 화목관계는 구원받은 죄인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도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림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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