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이사야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

짐 플레니건

1. 왕

2. 한 아이가 태어났고 ... 한 아들을 주심

3. 가지

4. 반석

5. 완전한 종

6. 목자

7. 슬픔의 사람

8. 메시아

9. 용사 - 왕

10 평화의 왕

 

1.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는 “복음주의 선지자”라고 불렸다. 그의 예언은 “이사야 복음서”라고 불렸다. 여러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은 그의 복음서를 즐겨왔으며 그의 수많은 위대한 환상으로부터 구원의 길을 전파했다. 그의 책은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다.

 

이사야는 유다의 네 왕의 통치 동안에 예언했다. 그는 웃시야 왕의 영광과 비극을 보았다. 그는 요담 왕 아래에서 16년 동안 살았고 아하스 왕의 가증한 삶 아래에서 16년 동안 살았고 그는 선한 왕 히스기야의 통치의 번영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위대한 군주의 영광을 보았다. 여러 환상에서 그는 그분의 아름다운 왕을 보았고, 이 왕의 묘사가 예언서 전체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사야의 예언은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수년 동안 대학과 신학교에서 이사야는 “고등 비평”의 대상이 되었고 사실 그 이론은 그 책이 이사야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고 가르쳐졌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가 둘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더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이사야 한 명만 인정했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은 그 시대에 자손일 뿐이며 당시의 지식으로만 말할 수 있었다는 신성 모독이 심했다. “고등 비평”은 그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공언했다!

 

그러나 약한 것을 사용하여 강한 것을 꺾으시는 하나님은 1947년에 작은 아랍 목동을 사용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밝히는 데 사용하셨다. 여리고에서 멀지 않은 사해 연안에 있는 쿰란이라는 지역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던 중 이 소년은 자신의 짐승 한 마리를 잃었다. 그는 주변 언덕에 있는 많은 동굴들 중 하나에 들어가 이 동굴들 중 하나에 돌을 던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뭔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도망쳤다. 나중에 그는 친구와 함께 돌아왔고 그들은 동굴로 과감히 들어갔다. 그가 던진 돌은 뚜껑이 달린 약 2피트 높이와 약 10인치 직경의 원통형 용기인 커다란 토기 항아리를 깨뜨렸다. 이 깨진 항아리에서 가죽 재질의 두루마리가 굴러 떨어졌다. 소년은 그것을 베들레헴으로 가져갔고 거기서 샌들의 끈을 만들겠다고 말한 구두 장인에게 팔았다. 그는 그것을 작은 가게의 선반에 올려놓았다.

얼마 후 한 학교 교사가 이 가게에 요청을 해서 선반에 있는 두루마리를 보고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모종의 양피지를 알아 차렸고 그것을 가져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이 발견은 전 세계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마침내 여기에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의 완전한 사본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의 완전하고 파손되지 않은 예언은 그리스도 약 2세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두루마리는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책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항상 믿어 왔던 것을 확인시켜주고, 우리 주님이 태어나시기 수세기 전에 이사야의 유일한 저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우리의 영어판 예언이 고대 사본과 비교될 때 그것은 원고를 수정하거나 수정할 필요가 없다.

 

이 웅장한 환상의 갤러리에서 우리는 왕의 묘사에 감탄하게 된다: 그분의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아들과 종, 목자와 고난 받는 자, 죄를 짊어지는 자, 주권자 등을 본다. 우리의 감사가 깊어지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빈다.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이사야에게 6장의 큰 환상이 주어졌다. 요한은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요 12:41). 이사야가 연기로 가득 찬 성전에서 높이 들어 올려진 주님을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웃시야 왕을 연상시켰을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웃시야를 번성케하셨다. 그는 16세의 소년으로 왕위에 올랐고, 52년 동안 유다의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자만심으로 그의 마음은 교만해졌다. 그는 왕실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까지 하려 했다. 그는 왕좌뿐만 아니라 성소도 탐했다. 그는 황금 제단과 왕좌를 갈망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무례함과 교만 때문에 그를 치셨다. 그는 나병환자가 되어 부정해졌다. 여전히 왕이었지만 그는 다시 왕좌에 앉을 수 없었고 나병환자로 격리상태로 있다가 죽었다(역대하 26장).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이사야가 말하기를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한다. yn;doa}(아도나이)는 지상의 왕들의 영광이 약해졌을 때 계속되는 영광으로 살아간다. “높이 들린” 그리고 모든 권리가 있다. 만약 웃시야가 “교만해”졌다면(대하 26:16) 그것은 자만과 허영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마땅히 받으셔야 할 왕실의 영광 안에서 높이 들리셨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다.” 그분의 왕의 옷의 영광이 성소를 가득 채운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벗어두신 옷인가? 이것이 그분이 강보에 싸여 바뀌신 옷인가? 그분의 비천함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자리를 위한 노력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가. 물론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치지 않으셨지만, 또 다른 경우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그분의 옷을 벗으셨다, 우리는 성전을 가득 채운 옷자락은 우리 세상에 오시려고 영광의 자리를 비우고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 누워 계시던 것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분을 포대기로 감쌌고 그분은 종의 앞치마로 몸에 두르셨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빌 2:5).

 

스랍은 그분 위에 섰다. 거룩한 이들은 그분의 종들이었다. 나중에 마가복음 1장에서 천사들은 광야에서 그분의 집사가 될 것이다. 여기 그들은 영광스러운 그분의 사역자들이다. 거룩한 경배와 존경과 순종으로 그들은 그분의 명령을 행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불완전하게 계시된 그 당시에도 여기에는 신성한 위격의 위대하신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있으며 스랍들이 그분에게 3번이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경외심으로 외친다. 그 소리에 집 문지방의 기초가 흔들리고 집은 연기로 가득 찼다. 웃시야는 향으로 가득 찬 성소에 서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마땅히 있지 못했고 거기에서 심판을 받았다. 이사야 6장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의 향이신 분 영광의 그리스도시다. 나중에 우리는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라고 다시 읽을 것이다(요 12:3). 그러나 이번에는 구속되고 예배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예배의 향기와 함께 마리아의 감사의 향기가 마치 하늘의 집이 연기로 가득 차 있던 것처럼 베다니의 집을 가득 채운다. 이사야는 장엄한 임재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낀다. “내게 화가 있도다! … 망하게 되었도다. …부정한 사람이요”(5절). 그는 성소에서 웃시야처럼 문둥병을 느낀다. 왕 곧 만군의 주(主)인 여호와의 군대를 보자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분을 보면 우리 자신이 보인다.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의 계시가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나 제단이 있다, 이 제단에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고 우리의 죄들은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임재 안에 서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라고 응답하며 말할 수 있는 은혜와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사야처럼 반역과 무정부 상태의 중심에서 왕의 대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분의 음성, 그분의 영광의 광경, 그분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그분이 오실 때까지 그분의 대리인으로서 이곳에서 그분을 위해 사는 우리의 사명이 되기를 바란다.

'짐 플레니건 > 이사야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사 - 왕  (0) 2021.10.06
구주  (0) 2021.10.03
슬픔의 사람  (0) 2021.09.29
목자  (0) 2021.09.29
완전한 종  (0) 2021.09.26
반석  (0) 2021.09.25
가지  (0) 2021.09.23
한 아이가 태어났고 … 한 아들을 주심  (0) 2021.09.22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