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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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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이사야 61장은 나사렛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광야에서 침례를 받고 시험을 받으신 후에 우리 주님은 갈릴리와 그분의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해 그분이 나사렛에서 자라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그곳은 악명 높은 마을이었다. 그것은 다마스커스와 레바논과 그 너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에 멈추는 곳이었다. 무역상, 상인, 군인, 다양한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그들은 이곳을 부도덕과 악덕으로 악명 높게 만들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30년 동안 우리 주님은 겸손하고 죄없이 살며 수고하셨다.

 

그분은 나사렛 회당에 아주 익숙했을 것이다. 그것은 배움의 중심이자 헌신과 매일의 토론을 위한 만남의 장소였다. 안식일에는 그곳에 가는 것이 그분의 관습이었으며, 성인 유대인 남성으로서 공개적으로 두루마리를 읽는 데 참여하는 것은 그분의 권리이자 특권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 언급된 안식일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에 남는 “안식일”이 되기 위해서였다. 우리 주님은 읽으려고 일어나셨다. 그분은 수행원에게서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그분은 묵묵히 그리고 확신에 차서 거룩한 친밀함을 가지고(시 1:2) 우리가 이사야 61장으로 알고 있는 곳을 발견하고 적절한 부분을 읽은 후 두루마리를 말아서 수행원에게 돌려주고 앉았다.

 

누가는 “은혜로운 말”을 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분의 설명에 놀랐다. 고대 이사야의 예언이 그 가운데 성취되고 있었던 역사적이고 놀라운 날이었다. 메시아가 왔다. 그분은 그들 사이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아오셨다. 그분은 30년 동안 인정받지 못한 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목수이자 목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영광이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휘장이 벗겨져야 했다. 그분은 그들과 민족에게 자신을 제시하실 것이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그분은 읽으셨다.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우리 주님은 참된 소제 제물이셨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삶은 모든 바람직한 도덕적 특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고운 가루, 가장 좋은 가루가 여호와께 바쳐져야 했다. 이제 가루에 기름을 부었다. 제물은 기름 부음 되었다. 그분은 요단에 서 있었고 부드러운 비둘기가 그분에게 머물고 그분을 나타내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제사장, 왕이 항상 그들의 직분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주님도 기름 부음 받았다. 이제 오늘, 나사렛 회당에서 그분은 기름 부음받은 메시아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이 날부터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분은 빈약한 자원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의 풍성함을 알릴 것이다.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메시지의 부요함을 주실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파산한 불쌍한 죄인들에게 그분은 귀중한 용서와 사면의 금을 주실 것이다. 즉, 그들이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또한 상심한 사람들을 위해 치유를 하셨다. 슬픔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싸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성이었다(시 147:3).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나사렛 사람들에게도 죄에 대한 슬픔이 눈에 띄게 없을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죄책감에 대한 상심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 치유를 가지고 오셨다.

 

포로된 자를 위한 구원도 있었다. 해방자가 오셨다. 로마의 속박의 멍에가 아직 풀리지 않았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한 족쇄에 빠져있었다. 죄의 사슬은 강력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죄로부터 자신을 풀려나기에 무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죄 많은 생각과 행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습관과 악덕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구원자는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속박과 그들이 도덕적으로 묶여있는 포로된 현실을 아는 사람들을 위해 구속주가 오셨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눈이 멀었는가! 그분은 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기 위해 오셨다. 그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알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들처럼 그들은 죄가 눈을 멀게 하여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이 실명은 사실 속박의 한 형태였다. 그들 가운데 있는 메시아가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가지셨다.

실제로 그들은 눈이 멀었고, 멍이 들었고, 파산하고, 마음이 상한 종들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역 회당의 겸손한 경계 안에 이사야 61장의 그리스도께서 예언자, 제사장, 주권자, 보호자, 치유자, 구속자로 서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되어야 할 그날은 슬픔에 잠겼다. 그들의 방문의 날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받아주시는 해였다. 그분은 거기에서 책을 덮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은혜 속에서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는 그분은 언젠가 그들의 몫이 될 복수의 날을 아직 선포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읽으실 때 그들의 눈은 그분께 고정되었다. 그들의 귀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고했다. 요셉의 아들이 정말로 이사야의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그들의 고향에서 올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불신으로 의심하면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의 이야기로부터 그분의 책망을 들었다. 당시 시돈 사람과 시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에 나환자와 과부를 지나쳐 갔던 사역으로 복을 받았다.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그들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일어났다. 그들은 그분을 쫓아냈다. 그들은 막 시작된 ​​사역을 3년 후 국가적으로 거부하며 예루살렘 밖의 다른 산 언덕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분을 산 낭떠러지로 인도했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고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복수의 날은 필연적으로 올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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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