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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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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이사야는 우리 주님을 가지로 묘사한 유일한 구약 선지자는 아니다. 예레미야와 스가랴도 메시아의 이 칭호를 잘 알고 있다. 히브리어 단어는 “rx,nE(네체르)”이고 일부는 “rx'n:N(나차르)”와 연관성이 있다고 상상했다. 이것은 어쩌면 부자연스럽지만 흥미로운 제안이다.

 

이사야 11장의 처음 구절은 성막과 성전의 금 등잔대를 연상시킨다. 그 등잔대에는 6개의 가지가 있고 중심 줄기가 있었다. 세 쌍의 가지가 중심 줄기를 아름다운 대칭으로 장식했다. 이 사랑스러운 주제는 우리가 보게 될 이사야 11장에서 반복된다.

 

여기에는 10장의 마지막 구절과 뚜렷하고 현저한 대조가 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인 아시리아 인들은 높은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베임 당하고 거기에 누워있다. 다윗의 집도 또한 벌목된 나무처럼 되었다. 물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줄기를 특별히 언급했다. 다윗의 집은 원래 베들레헴의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었지만 곧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방인의 숲 덤불이 쓰러진대로 누워있는 동안, 이새의 줄기에서 새싹이나 작은 가지가 솟아나온다. 이스라엘의 메마른 땅에서 나온 참으로 연한 식물이며 여호와의 기쁨을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뿌리에서 가지가 나온다. 이새의 베들레헴에서 강보에 싸인 아기의 부드러움. 소년의 부드러운 고요함과 멸시받는 나사렛에서 자란 은혜로운 청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는 가지.

 

일곱 영이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은 위엄있는 중심 줄기다. 그런 다음 세 쌍을 따라간다. 지혜와 이해의 영이 있다. 조언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여호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안식”이라는 단어는 “거주하다, 거하다, 집에 있다, 정착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영과의 끊임없는 교제에서 우리 주님과 항상 함께했다. 그러나 특히 우리는 그분의 침례와 ​​나사렛 회당에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할 때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분에게 머문 온유한 비둘기로 형태의 성령.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고” 그분은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읽으셨다.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세 신성한 위격에 주목하라. 1. 성령; 2. 여호와; 3. 내게. 아버지가 하늘에서 승인하시는 동안 비둘기는 아들 위에 머물렀다.

 

중심 줄기의 세 쌍의 가지에는 그리스도의 개인적, 공적, 도덕적 영광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이 땅에서 그분의 사역에서 그분 안에 보여졌고, 그분이 통치하기 위해 왕국 영광으로 다시 땅에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이 장의 대부분의 주제이다. 메시아, 가지의 다양한 영광은 그분이 통치할 때 그분의 왕국에 특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 영광을 살펴보라.

 

지혜와 명철의

지혜와 명철은 신성한 메시아의 속성이다. 그것들은 그분의 인격적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영광을 선포한다. 메시아가 신성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지금도 그렇다. 만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한 주이시며 이방인들의 많은 신들과 같지 않다면, 오시는 분도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을 때 항상 그들의 문제였다. 당연히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보았고 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복수의 “엘로힘”(창 1:1)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지속되고 있다(신명기 6:4를 비교하라). 지혜와 명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지혜 :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는 힘.”

명철 :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

 

조언과 능력의

이전에 우리는 주님을 조언자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보았다. 여기 같은 주제가 반복되고 있으며 여기에 그분의 공적인 영광이 있다. 통치자에게 조언과 능력보다 더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조언이 부족하여 얼마나 많은 강력한 통치자들이 쓰러졌는지. 얼마나 많은 현명한 통치자들이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구현할 힘이 부족하여 쓰러졌는지. 이 두 가지는 균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들은 둘 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조언 : “올바른 결론을 형성하는 은사.”

능력 : “힘으로 그것들을 수행하는 능력.”

 

지식과 여호와에 대한 경외함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여호와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주님을 아는 사람들의 특징인 행동의 경외심과 품위를 가져온다. 이것은 모두 주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보여진다.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도덕적 영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지식은 완전했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되 나는 그분을 아노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 8:55). 그것은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던 한 분의 지식이다. 그분은 아버지를 친밀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교제에 기초한 그러한 지식에는 오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삶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동반된다. 그분은 그렇게 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지식 : “완전한 지식은 사랑의 동반자 관계에 기초한다.”

여호와를 경외함 :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쁨에서 경외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은 하셨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빨리 깨닫게”(사 11:3).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의 의미는 이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경외함은 그분에게 향기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향기를 기뻐하며 느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후에 판단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판단은 문제가 여호와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주님의 영광에 대한 이러한 소망은 왕국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다. 의와 신실함으로 띠를 두르고 그리스도께서는 천년왕국의 영광 가운데 홀을 잡으실 것이다. 그분은 공정하고 공평하게 통치할 것이다. 악한 자를 멸망시킨 그분은 자신의 왕좌를 차지할 것이다. 한때 강보와 수건을 두르고, 자주색 조롱의 겉옷과 수의로 띠를 띠고 있던 그분께서 영광으로 띠를 띠고 땅에 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다.

 

오 그 왕국의 영광이여! 늑대와 어린양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이다. 그리고 표범과 아이; 송아지와 사자; 소와 곰. 그들은 함께 초장에 갈 것이다. 평화의 왕이 왕좌에 있다. 아이는 살무사의 굴에서 안전하게 놀 것이다. 아기도 더 이상 독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아름다움을 영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자. 그러한 상황은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여기 계실 때도 문자 그대로 일어났다. 그것들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얻을 것이다. 그것들은 왕좌에 앉는 사람과 평화로운 창조물과 함께 에덴의 영광스러운 회복이다. 이새의 줄기는 열방의 모임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 자비로운 통치의 축복을 알게 될 것이며 구주 또한 그분의 영광 가운데 안식하실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의 입에는 오르내리는 말 “알리야”(유대 교회에서 율법서를 낭독하기 위해 성전대로 올라가는 것 - 역자주)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올라감” 또는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분산 즉 “흩어짐”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민족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국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벤 구리온은 깊은 감동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천 년 동안 우리는 이 시간을 기다렸고 이제 일어났다. 이스라엘 국가는 망명자들을 모으기 위해 개방되어 있다. 자유, 정의와 평화의 기초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직시했던 대로.” 아아, 그것은 슬픈 불신 가운데 다시 모이는 것이다. 아직 천년왕국의 날 “샬롬”이 아니다. 마른 뼈에는 아직 생명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반세기의 놀라운 사건을 돌이켜 보면 여전히 그런 일이 있다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언젠가 우리 주 예수님은 모임의 중심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와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들은 사방에서 올 것이다. 이집트와 앗시리아에서; 바드로스와 구스에서; 엘람과 시날에서;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나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갔을 때처럼 다시 올라갈 것이다. 11장 뒤에 12장의 노래가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인가? 이사야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속과 같은 유사점이 있어서 “주께서 뛰어난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그분께 노래하라”(사 12:5)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

 

“이름이 가지인 사람을 보라… 곧 그가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으며 자기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요”(슥 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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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