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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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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40장은 이사야의 예언에 분기점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책의 두 번째 위대한 부분의 시작이다. 구약의 39권에 대한 답으로 39개의 장이 지나갔다. 신약의 27권에 대한 답은 아직 27장이다. 40장은 이 27개 장 중 첫 번째 장이다. 여기에서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초반에 소개되고 있다. 회개에 대한 부르심에 대한 광야 사역이었다.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이다. 아마도 그는 진정한 목자의 문을 여는 문지기일 것이다. 장의 11절에서 목자는 소개된다.

 

은혜와 영광의 위대함과 온유함의 묘하고 부드러운 혼합이 있다. 양떼를 부드럽게 돌보는 목자는 다름 아닌 창조주이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여호와시요 민족들과 함께하는 거룩한 분이시며 두레박의 한 방울이나 균형 잡힌 고운 가루와 같다. 땅의 위대한 것들과 위대한 사람들은 그분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분의 위대하심으로 그분의 양떼인 그분의 백성을 향해 온유하게 움직이신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다. 시편 23편에서 그의 첫 마디는 단지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여호와 로히!” 나의 목자는 여호와이다.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기억할 때 우리는 그분의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시는데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안식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위대함에 비추어 볼 때 그분의 목자 사역은 새로운 위대함을 나타낸다.

 

베들레헴 이전 1,500년 동안 그분은 이스라엘의 목자였다(시 80:1). 수세기 동안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그분은 그 길 잃은 양떼를 보살폈다. 그분은 그들의 역경과 불평과 불신으로 참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을까? 내가 지금 “나의 목자”라고 부르는 그분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실패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며, 그분은 옛 이스라엘을 돌보셨던 것처럼 나를 돌보아 주신다.

 

사 40:11에는 목자의 네 가지 사역이 있다. 그분은 먹이를 준다. 그분은 모으신다. 그분은 옮긴다; 그분은 이끈다. 육신의 시대에 그분은 “작은 무리”(눅 12:32)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행하셨다. 이제 그분은 높이 올라갔지만 그분의 사역은 계속된다. 그분은 목자장이시다(벧전 5:4). 그분은 목자들이 있다. 그분은 당신을 돌보신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보살피신다. 때때로 그것은 모임에서 목자들의 인내 사역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분은 양떼를 먹이신다. 그분이 여기 계실 때 얼마나 자비롭고 끈기 있게 어린양 떼를 먹여주셨는가. 그분은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셨고 그들은 그분을 따랐다. 그들이 함께 걷거나 함께 앉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진리를 설명하고 먹이셨다. 때로는 산 기슭에서, 때로는 동산에서; 때로는 바닷가나 집에서; 성전 뜰이나 큰 길에서. 그러나 그분은 항상 그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고 이것이 그들의 음식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생계와 자양분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성장에 말씀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때때로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읽을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의 독서에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역하고 우리가 음식을 제공받는다면 이것은 좋은 것이다. 다른 때에 그분이 자신의 종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풍요로운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면 이것도 좋다. 그분과 단 둘이 있든 그분의 목자들의 사역을 기다리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양떼의 먹이이다.

 

그분은 모으신다. 무리라는 개념 자체가 함께 함을 암시한다. 모으는 것은 목자의 사역이다. 분산시키는 것은 적의 일이다. 종파적 분단은 수년 동안 악마의 위대한 전략이었다. 인간 시스템과 분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성경적으로 모인 모임의 연합이다. “나의 성도들을 내게로 함께 모을지니”(시 50:5).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마 18:20).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시 133:1).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창 49:10).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마음이므로 그분은 모으신다. 하지만 어떻게? 그 대답은 다시 그분의 말씀에 있다. 방향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사람이 그렇게 만든 곳을 제외하면 복잡한 것이 없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러면 양떼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분을 발견하리라!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는 것은 여전히 ​​광야의 사역이다. 그분은 도시에 없다. 그분은 캠프에 없다.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밖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과 함께 모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갈 때 우리는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며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함께” 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께 모이는 것은 교파주의가 아니다.

 

그분은 옮기신다. 이 단어 “옮기다”는 아론의 제사장직을 소개하는 출애굽기 28장에 네 번 나오는 단어이다. 우리는 “아론이 담당할지니라…”를 네 번 읽는다. “담당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이사야 40:11에서 “옮기다”로 번역된 단어이다. 아론은 사람들을 품었다. 그는 그들의 이름을 어깨와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는 그의 관(冠)에 그들의 명분을 지고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는 우림과 둠밈을 짊어졌다. 그는 어깨의 힘과 마음의 동정심으로 그것들을 짊어졌다. 우리 주 예수님도 우리를 짊어지신다. 우리의 안전과 슬픔 속에서 그분은 우리를 안고계신다. 그분은 40:11에서 어린양을 옮기신다. 그분은 46:4에서 우리를 노년에 이를 때까지 이끄신다. 우리는 “내 구주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모든 길”을 노래한다. 이것은 이사야 40장에서 목자의 사역에 우리를 네 번째 측면으로 이끈다.

 

그분은 인도하신다. 그분은 부드럽게 인도하신다. 양떼 속에 어린양이 있다. 일부 암컷들은 새끼를 곁에 두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된 목자는 어린양에 맞게 무리의 속도를 부드럽게 조정하신다. 그분은 별도의 양떼를 만들지 않는다. 그분은 양떼의 일체감을 유지하지만, 양들이 함께 움직일 때 특별한 필요를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는 어린양들은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매우 적대적이다. 불신과 역경이 있다. 시험, 유혹, 함정, 올무가 있다. 그들은 부드러운 인도가 필요하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특별히 소집된 집회가 필요하지 않다. 분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고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그들이 응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진 권고가 필요하다.

 

어떤 형제에게도 목자가 되는 것은 큰 특권이다. 당신의 일은 목자장 자신과 양떼의 영적 모두에게 감사함이 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먹이고 모으고 옮기고 인도하는 목자의 사역을 은혜롭게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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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