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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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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는 지식에서 자라감

벧전 2:1-10

알렉스 윌슨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오늘 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축복하신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성취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하심과 은혜로운 공급하심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서의 마지막에 은혜 가운데서 자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베드로후서 마지막에 인사하였습니다. 아멘. 이것이 베드로가 큰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었는데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를 아는 지식, 완전하게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깨끗하게 하신 이유는 영적으로 자라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것을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확인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가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는 특권이며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가능하도록 모든 공급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셨습니다.

고전 6:17에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고 하였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거기서 나아가서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의 몸 안에서는 피가 순환하고 있습니다. 혈액이 온 몸의 세포조직을 순환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의 오른 손은 저의 몸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이 일어서서 말할 수 있도록 손과 몸이 도와줍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제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과 같은 삶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멸망치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하심을 벗어나서 육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바는 헤아릴 수 있는 것 이상의 큰 것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들이 삶을 살 것과 삶의 목적이 무엇인 것과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30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는 놀라운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을 합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내제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여인이 남자로부터 취하였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와가 그 받은 생명은 남자가 창조될 때 받았던 그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실 때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존된 생명이 바로 우리가 받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말씀과 같은데 그 3장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랍게 베풀어주신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 없어질 영광이 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말씀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게 될 것입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볼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이 말씀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건이 필요 없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바라볼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주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특권 안에 살도록 우리를 목적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 때 물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부분의 영광에서 다른 영광으로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즉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과 상태가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특권입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한 한 영광에서 다른 수준의 영광으로 계속 계속 옮겨가고 변화해 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의 우리의 변화에 대해서 며칠 전에 상고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의 말씀은 우리가 점진적으로 경험하는 실행 가운데서의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이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 그 동기를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보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3개월 전에 비해서 점점 더 영적으로 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7장에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제자들 앞에서 변화하실 때 그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능력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영광이 하나님의 아드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의 옷이 변하였습니다.

베드로서로 돌아가서 1 3-4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매우 형편없는 변명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원하는 바에 관심을 둠으로 말미암아 진보를 별로 이루어 내지를 못합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데는 여러가지 영역들이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똑똑하지가 않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지도자가 없다고 변명하기도 합니다. “나는 성경 읽을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변명이 어떠하든지 그 사람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푸신 모든 공급하심과 축복하심에 문을 닫아 걸고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부주의함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인데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거듭나서 하늘나라 갈 것이니까 결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동안에 나는 하나님의 것에 최소한의 관심만 두고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고 허락하신 것을 그와 같이 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결코 알지 못했던 그러한 두려움 없는 상황가운데 처하는 것을 관심없어 하는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대제사장 아론이 있었습니다. 피없이는 지성소에 향을 피우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즉시 죽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가운데 떨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볼 때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나타나심이라고 인정합니다.

우리가 읽은 짧은 구절에서 교제할 것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하시고 심판으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를 지옥으로부터 놀랍게 건져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시대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했던 그러한 놀라운 특권가운데로 우리들을 가까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계시는 그 장소로 우리들을 이끌어 들이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계심 가운데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성가운데 우리는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주신 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 한가지는 사실이며 베드로가 이것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들, 하나님의 문제 가운데 들어가는 열린 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자신과 우리를 관계 맺게 합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한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것은 너무 명확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 교제 가운데 오늘 들어있습니까? 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주님께 기도를 드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까? 제가 한국을 다니다 보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슬프게도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만약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가 되지 못하였더라면 저들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자 중에 한 명으로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때에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된 자들로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될 것은 분명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을 버리라그러나 이 악독이 어떤 때는 하고 어떤 때는 하지 않고의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것을 완전하게 버리는 것이며 그 버린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영장을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여러분들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들을 생각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거되어야만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말씀과 축복에 관한 것들이 분명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 21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가 말한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버리고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더욱 간단한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마음에 심긴 도를 받는다면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지켜야 될 것을 받는다면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영역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보면 완전히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모든 패역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가장함(꾸밈)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모든 궤휼이 나옵니다. 궤휼은 우리가 아닌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악독과 궤휼이 같이 나오는 것은 이중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말은 하면서 버려야 할 것이 가득한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이것들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잘못된 믿음 가운데 스스로를 확신하며 삶을 계속 영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악독, 궤휼, 그리고 외식. 외식이라는 말은 요즘 뜻이 많이 변질되었는데 아닌데도 꾸며서 그런 척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속해 있지 않은데 속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투명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면 수월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을 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어떤 자인지를 발견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지 않은 자인 것을 들키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특히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믿음과 반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는 점점 양심이 무디어져 돌과 같은 상황이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은 시기입니다. 시기함으로, 부러워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볼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 앞에 다 알려진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어하는데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도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작은 지체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전체를 다스리겠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절에서 시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1절에 나와있는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인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내버리라는 말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특징지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가지로 가지고 있어야 할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 2절은 갓난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사람이나 그런 자들에게 특별히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바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건강을 바라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과 같은 말씀을 사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1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2절에 영어성경에는 말씀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데 이와 같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짧은 집회 시간 동안에 모든 성도들이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그 구원은 영혼의 구원에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씀이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우리가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우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입니다.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든 자매든 그 바라는 소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젖먹임을 받고 말씀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태어나게 되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자라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통상적으로 자랄 때는 어떻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자라는 것이 결정됩니다. 얼마나 음식을 자주 먹는가. 아이는 음식에 대한 갈망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볼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육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식욕은 무엇인가? 우리의 양육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것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섯 장을 읽는데 석 달이 걸렸습니다. 그 안에 이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영적으로 양육시키시고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사람은 영양실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우리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들을 섞어버림으로써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것들을 자아내었습니다. 우리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지키고 사모해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그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보면 맛보는 것이 진전되는 것이 나옵니다. 읽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말씀이 나를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점점 더 깊어져 이 식욕이 읽는 자의 것이 됩니다. 읽는 자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고 말합니다. 인자하심을 맛 보았다면 즉 이미 맛을 본 사람을 말합니다. 어제 어떤 일이 있어 서울역에 갔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상당수의 사람이 지하에나 바깥에 술 취해서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말씀을 잘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말하는 바를 동의하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한 두번 말한 후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건강에 대해서 경고를 해주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점점 더 관심이 커져 가는 사람을 거기에 중독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너무 심취해서 정작 필요한 다른 필수적인 말씀을 등한히 여길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중독입니다. 그것은 샘물이 솟아나서 그를 소생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19세기에 컴퓨터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오직 성경에 심취한 사람들을 볼 때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말씀을 공부하여 알아낸 것들을 책을 통해서 읽을 때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시편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가 맛보았나이다.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우리가 오늘 나누었던 축복가운데의 축복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 본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공부케 해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것보다 더 가치로운 것들을 혹시라도 세상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들에게 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 할지라도 그것들로 균형을 잃는다면 우리가 영원가운데 지속되어야 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원리를 하나 만들어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면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영광에 압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들이 변화하였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 동네에서는 다양한 연령대의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놀 때나 TV를 시청할 때 특히 축구나 스포츠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아이들이 거리에서 놀 때에 입는 옷이나 신는 신발등 장구들을 보면 프로팀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관심을 갖고 있는 선망의 대상을 그들이 갖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한 옷을 입습니다. 어떤 아이가 파란색 옷과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아 첼시 팀이다. 여기서 주어진 경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마음을 쏟고 있는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닮아갈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 갈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그것을 숨기려 할지라도 결국 우리의 관심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볼 때에 저 그리스도인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매를 볼 때에 그 자매의 모습이 점점 더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두 형제 자매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그 관심은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읽고 배워야 합니다. 어떤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엘라 골짝에서 다윗이 내려올 때 어떤 띠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다섯개의 부드러운 조약돌을 주어 들었습니다. 오직 그 거인을 대적한 유일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미친 사람도 아니고 즉석에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자와 곰을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알면 알수록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과, 학력과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육체적인 능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진실로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점점 더 그것에 닮게 변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우리가 아는 가운데 안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2 5 30일(수) 의왕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