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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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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베다바라(베다니-개역) 이름은 우리들의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나옵니다(요 1:28). 일부 고대 사본은 이것을 “베다니”로 번역하고 예루살렘의 2마일 정도 떨어진 감람산에 있는 베다니와 구별하기 위해 더 낫게 구별하려고 해당 조항을 추가하여 “요단 건너 베다니”가 되었습니다. JNDRV를 포함하여 많은 주석가들과 여러 버전들이 이 후자의 해석을 따르지만, 적절한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요한이 침례 주었던 장소는 여리고에서 약 12마일 북쪽 요단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합니다.

 

현재 묵상의 목적은 베다바라 이름이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나는 이야기 안에서 베다바라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는 “횡단 또는 건널목의 집”을 의미합니다.

 

이전 묵상의 주제 베들레헴 사건 이후 이제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과 베다바라 사이에 복되신 주님은 나사렛에 계셨습니다. 그때들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구주께서 목수의 집에서 단순하게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살았으며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지냈던 때는 우리에게 그것들은 실제로 숨겨진 시절이며, 상대적으로 무명시절이었습니다. 그분은 물론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그분을 바라보며 언제나 그분을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모르거나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으로 자랐고 믿지 않는 민족의 메마른 땅에서 도덕적으로 향기가 났을 것입니다(사 53:2). 하나님의 성령은 실제로 우리에게 그 세월의 세부 사항을 숨겨왔습니다. 다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한 소년의 유쾌함을 살짝 본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많은 이야기들은 그 소년기 시절을 날조하지만 그것들은 가설적이고 의심스러움과, 상상적이며, 우리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또한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베다바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지금 확인하듯이 소년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제 그분께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분의 머리 둘 곳이 없었을 정도로 그분에게 끊임없는 요청을 하는 바쁜 시기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여우도 그들의 굴에서 쉬었고, 밤에는 새들도 둥지에서 평화로웠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찾았습니다(마 8:20).

 

30년 간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셨을 때, 요한은 유대광야에 살았습니다(눅 1:80). 그의 노부모, 사가랴와 엘리자베스는 산간 지방의 엔 케렘에서 살았으며 곧 죽었을 수 있지만 요한이 그의 사역에 앞서 적어도 오랜 세월 동안의 거했던 것은 강력하고 믿을만한 구전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로 알려진 유대인 집단의 극단적인 종파와 함께 이들은 생활 방식의 많은 흥미로운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사해 기슭 쿰란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그들의 토라 안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요한의 의복(낙타털로 만든 의복과 가죽 띠)과 그의 단순한 음식에 대한(메뚜기와 야생 꿀) 근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참으로 택한 그릇이었고, 그의 가르침은 곧 유대에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요한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나”(요 10:41) 그의 가르침은 너무 강력하고 큰 무리가 있었기에 곧 유대인 지도자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 레위인들, 바리새인들 대표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보내졌습니다(요 1:19,24). 요한은 거룩함을 전파하고 강한 표현으로 죄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독사의 세대에게 임할 진노를 경고하고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그런 다음 요단강에서 자백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으며 현실을 촉구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그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는 종교와 신앙심이 없는 세리, 군인, 일반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왔고 그의 메시지는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그들에게 외쳤고 모두에게 동일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헤롯왕에게 과감하게 맞서면서도 그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결과로 투옥되고 죽게 되었지만, 요한은 심지어 죽음도 불사하며 신실했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대사였고 단호하고 변함없이 진정한 왕을 대표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전성기는 베다바라에서 찾아왔습니다. 주 예수님에게 그것은 참으로 “건널목의 집”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사생활을 끝내고 3년의 매우 바쁜 사역의 공생애로 넘어가는데 요한에게는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러한 침례의 특성과 영향력이 너무 커서 많은 사람이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궁금해했지만 요한의 부인은 단호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은 마치 그가 그들에게 조급해 하는 것처럼 점점 짧아졌고 그 어느 때보다 간략해졌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19-21). 또 다시 그들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해 줄 수 있도록 당신은 자신을 가리켜 누구라고 합니까?”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으며 그는 단지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왔다는 것보다 더 강한 분이 있으니 그들이 그분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풀 것입니다.

 

그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29-30) 메시아는 오셨고 그들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