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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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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베다바라는 우리가 보았던 대로 실제로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한 “건널목의 집”입니다. 그분은 사생활에서 널리 알려짐으로, 고독함에서 군중으로, 사생활에서도 공적으로 가로질러 가셨습니다. 그것은 역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최종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베들레헴을 방문하셨습니까? 앞으로의 바쁜 행로는 갈보리에서 그분의 죽음에 이를 것이고 그 때까지 그분의 날들은 감람산에서 외로운 밤을 보내고, 전도, 가르침, 치유와 기도하는 지속적인 사역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베다바라는 침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그분을 나타내고 가리켰던 전환점의 중대한 기로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다음처럼 기록했습니다:

 

그는 그분이 걸어올 때 그분을 보았다,
그는 그분이 걷는 대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홀함과 경건한 마음으로 외쳤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마침내 예언의 별들이
하루에 사라졌다,
그리고 과거의 그림자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요한은 참으로 특권이 주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양의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준 문지기였습니다(요 10:3). 곧 목자는 그분의 양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그분은 그들을 인도하여 낼 것입니다; 안드레와 요한, 베드로와 야고보,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청중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실 갈보리의 구주에 대한 초기의 암시였습니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양을 하나님께 데려왔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어린양을 데려오셨습니다. 요한은 참으로 참된 증인이었지만 요한보다 더 큰 증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침례 베풀던 요단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회개에 대한 침례였고 이에 복종했던 사람들은 죄들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요한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요한이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들 두 가족은 친척이었고 그들의 어머니들은 사촌이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님을 결코 본 적이 없었고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라고 말할 수 있는지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요한은 그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의 의미이고 나사렛 시절의 거룩한 생활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 아직 그가 메시아로서의 그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는 일부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까이 오셨을 때 요한에게 이것은 참으로 약속된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구주께서는 두드러진 겸손으로 요한이 자신에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모든 신자가 알고 있듯이 회개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왜 죄를 범한 적이 없는 분이 이 같은 침례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죽음의 물에서 분투하는 양들을 그분은 보셨고 그분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아름답게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의 전도에 반응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격려가 되었고 또한 요한이 그분의 침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격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갈보리 그 자체의 미리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받아야 할 침례가 있다”고 그분은 나중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 12:50). 그분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과 심판의 깊은 물에 잠기게 될 것이고 요단에서 그분의 침례는 그 엄숙한 날에 관해 희미하게 미리보기에 불과합니다.

 

요한보다 더 큰 증인이 있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다바라는 위대한 삼위일체 즉 신성한 위격의 거룩한 삼위일체가 계시된 장면이었습니다. 아들은 물 속에 서고, 성령께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물고, 아버지의 음성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적절합니까 이것으로 메시아가 공적으로 소개될 때 마치 뒤를 이을 사역의 직무에 대한 거룩한 승인을 받은 것처럼 연합된 신격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람으로 소개될 때 그분이 요단강의 진흙 바닥에 서신 것을 처음 보였다는 것은 어떤 은혜, 어떤 겸손입니까? 유쾌한 강이 아니었습니다. 아람 사람 나아만은 그것을 알고 말했습니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왕하 5:12). 그러나 구주는 그 자리에 서서 마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세상에 그분을 데려온 낮아지심의 자세를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그분은 영광의 높은 곳에서 요단의 진흙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 3:16-17) 다른 번역본에 따르면, “내가 누구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는지”(JND). 여기를 돌이켜 보면 나사렛 시절의 숨겨진 동안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미했던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30년 동안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왔던 분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마른 땅에 연한 풀과 같았습니다. 땅은 메마르고 죄악과 위선이 가득했습니다. 이 죄의 저주받은 장면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이제 베다바라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스런 사람을 민족에게 소개하실 것이며 이 시점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분에게 쏠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미워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분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계속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봉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몇 년 안에 하늘이 열릴 것이고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그분의 아들에 대한 그분의 기쁨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사렛의 이름없는 사람에서 떠나 “그물 집”으로 불리는 벧세다로 가셔서 사람을 낚는 위대한 봉사의 직무에 그분의 동료가 될 사람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