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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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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제시된 바와 같이 5,000명을 먹인 요한의 기록은 다른 세 복음서에는 없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세부사항은 보완적이며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요한이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는 한 완전한 연약함의 배경을 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가 넘어가 있으며 빛이 사라집니다. 이 지역은 무인지경으로 황무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빵이 없고 군중은 많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얼마의 음식물을 가진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다섯 개 보리 빵과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를 가진 소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많은 무리 가운데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섯 개의 보리 빵과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 요한에 의해서만 기록된 약점을 주목하십시오. 그냥 소년, 소년! 빵은 값싼 보리로 만든 곡물입니다! 물고기는 조금이고 작았습니다! 그러나 구주의 손에는 집히는 것은 많지 않고 제자들이 구주께서 감사를 드리시고 축복하신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면서 땅에 질서 있게 사람들을 앉혔습니다. 기적적으로 수천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조각을 거두니 12바구니 가득 채워졌습니다. 아무것도 버려져서는 않됩니다.

 

제자들은 그 때 호수의 같은 쪽에 있고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벳새다 또는 가버나움을 향해 배를 타고 연안을 항해하며 가라는 주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어두웠고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을 삼으려는데 대하여 제자들은 또 다른 기적의 특권 증인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시기상조였으며 그분께서 산비탈에 홀로 있기 위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제자들을 태운 배는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의 경고도 없이 폭풍이 바다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참으로 빨리 확인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제 날이 어두웠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라”(요 6:17)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거친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얼마나 자주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까! 상황이 어둡고 거친 통행이라 할 수 있으며 아마도 그분은 대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고 알고 계셨으며, 높은데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괴롭히는 것들을 그분의 발 아래 두시고 물위를 걸어서 그들을 향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받아들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더라”(요 6:19-21). 구주께서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게” 이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막 3:14). 그분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순조로운 항해”를 항상 하지 않을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심인가요? 폭풍과 험한 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분의 성도들에게도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므로 그 파도들이 잔잔하게 되는도다”(시 107:29)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권능들이 벳새다 또는 근처에서 행해졌지만 이들 중 많은 수가 개별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8:22-26에서 기적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카이사르 빌립보의 경계를 향해 움직이실 때부터 요단 동쪽에 있는 벳새다 쥴리아스이었을 벳새다에 이르렀습니다(막 8:27). 한 눈먼 사람이 그분께 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어 친구들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구주를 향해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인도하신 것은 큰 겸손과 동정심과 부드러움의 한 예입니다. 왜요? 물론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와 다른 사람들이 제시했던 것처럼 그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벳새다의 주민들의 완고한 불충실함 때문에 우리의 주님은 그들 중에서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며 심지어 그분이 치료했던 사람 마저도 그 성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막 8:26).

 

어떤 이유인지 구주께서는 설명하지 않고 눈먼 사람의 눈에 침을 바르셨습니다. 아마도 이 일에 기적적인 것은 없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분비물이 가난한 사람의 눈꺼풀을 달라붙게 하고 침으로 문지르면 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뭔가를 보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에 의해 나무와 구별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전과 같은 상태인가요? 시력이 떨어졌을 때, 그는 기억했는가요? 주님께서 다시 그의 눈 위에 그분의 손을 얹고 그를 올려다보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시력은 회복되었으며 그는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치유의 유일한 경우이며, 종종 점진적인 회복에 대한 이유에 관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이것은 설명되지 않으며 우리는 주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누구인가요? 구주께서 이렇게 하기로 하신 경우라면 그때는 그분께서 권리를 가지십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회복을 가지는 어떤 어려움이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점차 빛 안으로 데려오는 거기에 연민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가 익숙지 않은 빛에 눈부시지 않도록 점차적으로 빛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아담 클라크는 기록하기를 “우리의 주님께서 순간적으로 시력을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 자신의 은혜의 주권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해 본문에 언급된 방법으로 그것을 하기로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지적하는 것은 하찮은 방법이 그 자체에 나타날 수도 있어도 그분께서 그렇게 일하도록 선택하시면 신성한 효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작은 자비의 처음 나타남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들은 불구하고 평화의 복음의 복된 충만의 시작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