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짐 플레니건

유대인들은 이제 구주를 죽이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분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으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요 5:18). 그들에게 아들 되심은 동등함으로 여기는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거부하는 자들의 반대 이유는 이것이 그분에게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복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되심을 동등함을 내포한 것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이 기적은 이제 주 예수님에 관한 긴 담론을 일으키며, 베데스다 연못의 다섯 주랑의 그늘에서, 이 담론이 아버지와 아들의 다섯 가지 동등함을 제시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동등한 신성(18절)

이것은 유대인들을 화나게 했으며 다 그분께서 하나님을 그분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그분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본질적인 신성, 신성은 근본적이었으며 분명하게 보고 이해하는 열린 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일찍이 창세기 1:1에서 위대한 이름 “하나님”에 대한 신성한 위격의 위대한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엘로힘은 복수형이지만, “창조했다” 동사는 단수형입니다. 단수 동사가 있는 복수 이름! 어떻게? 왜요? 여기에 삼위일체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나중에 계시될 한 신격 안에 세 위격의 거룩한 단일성과 동등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로 행동하므로 단수 동사입니다. 물론 오늘날까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유대인들에게(그리고 또한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동등한 목적(19절)

신성한 위격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일하시며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분명하게 아드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내가 왔나이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 40: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많은 희생이었지만, 그분은 완벽하게 행하셨고 그것을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목적상 신성하신 위격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동등한 권능(21절)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위대한 권능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 야이로의 딸(눅 8장), 그리고 요 11장에 나사로의 일어남을 비교하십시오. 구주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께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곁에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그것을 말하였사오니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이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42).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심을 사람들은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때 육체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영적으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엡 2:1)기 때문입니다.

 

동등한 영광(23절)

그래서 구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께 동등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신중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의 말로 노래합니다.

 

아버지의 요구하는 모든 권고
아들에게 동등한 영광을;
모든 아들의 빛나는 광채
아버지의 영광을 알게 하소서

- J.N. 다비

 

동등한 본질(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의 중요성,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어떤 존재나 근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아들도 그러합니다. 그분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졌습니다. 이 본질적인 생명에는 동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열방들의 신들은 생명이 없었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죽은 신들이었으며, 복음을 믿고 그들에게서 돌아섰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살전 1:9-10).

 

이것은 실제로 긴 담론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주의깊은 연구자들은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한 다섯 가지 증거의 경우를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님에 대한 다섯 가지 증언을 발견할 것입니다(31-39절). 또한 24절에서 “진실로 진실로”가 다음에 나오는 다섯 가지 복음 호소와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의 숫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숫자 다섯의 의미에 관해서 약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사람의 나약함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많은 차이가 있습니까? 사람이 연약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약함은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께 대한 기회가 아닌가요? 아마도 베데스다의 무기력한 사람은 이들 두 가지 모두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를 돕기 위해 은혜로 오실 때까지 그 허약함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자비의 집에서 그분을 만나 건강과 기력을 되찾아 주신 복되신 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