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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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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이름은(자비의 집) 요한복음 5:2에서 우리 성경에 단 한 번 나옵니다. 갈릴리 바다의 북쪽 해안에 있는 마을 벳새다와 혼동하면 안되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가까이 작은 연못의 이름입니다. KJV에서 “시장”이란 단어는 이탤릭체로 나타내고 있어 원문에도 없으며 또한 여기서 시장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의 문은 느헤미야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으며(느 3:1; 3:32; 12:39), 희생물을 위해 양과 소가 성전으로 끌려가며 통과하는 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는 없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장소는 스데반의 문과 안토니아의 탑에서 멀지 않은 예루살렘 베제다 지역에서 발굴 중에 발견된 작은 연못이다. 새 엉거 성경사전은 이 위치가 “파괴된 4세기 교회의 지하실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의 치유의 기적에 대해 담은 희미한 벽화와 다섯 개의 아치형 현관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반즈 성경 노트는 유익하게 설명합니다, “‘베란다’란 단어는 사람들이 더운 날씨에 앉거나 걸을 수 있는 일반적으로 건물을 둘러싼 덮개가 있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여기는 아마 병자들이 머물 수 있는 다섯 곳의 덮인 장소 또는 아파트가 있었고 각 곳에서 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병자들이 거기에 있었습니까! 소경, 다리불구, 그리고 쇠약자들. 죄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대혼란의 슬픈 그림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저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뿐만 아니라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 위치가 의심스럽다면 그곳에서 고침을 받은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은 그의 치유의 장소를 결코 잊거나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주변 병자들 무리 중에서 선택된 그에게 그곳은 구주께서 그의 절실한 필요성에서 그를 만나셨고 그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신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5장과 9장에 기적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두 사람, 두 개의 연못, 베데스다와 실로암, 둘 다 안식일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5장의 사람은 볼 수는 있었지만 걸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사람은 걸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었습니다. 구주께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히 대처하셨고 그들이 제공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를 나타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뜻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무기력했던 사람은 자비에 달려있었으며 그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가서 씻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가서 씻었습니다. 각각의 기적은 주 예수님에 관한 긴 담론을 낳았고 각 경우에 유대인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비록 요한복음 5:4의 신빙성에 일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심하거나 생략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JND에 기록한 바와 같이, “아직도 축복의 잔재가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있었습니다. 천상의 일꾼들인 천사들은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일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증거 없이 그분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봉사의 경우에 유익을 위해서 힘이 필요했습니다. 율법이 육체의 연약함을 통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습니다. 무력한 사람은 욕망이 있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원함은 그와 같이 임했지만 실행할 힘이 없습니다.”

 

38년 동안 이 불쌍한 사람은 병약했습니다. 그의 병약한 정확한 특성은 일종의 마비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38년은 민족이 광야를 방황하던 기간이었던가요?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머물렀지만 그들이 주님의 손에 인도된 것은 그 기간의 일부가 아니었던가요? 38년간의 민족의 연약함! 그분께서 그들에게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복과 함께 얼마나 메시아를 필요로 했는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의 날 이들 유대인들은 나중에 그분께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베데스다에서 했던 것처럼 그분께서 그들에게 주실 모든 표적은 거절될 것입니다. 오히려 믿기​​보다는 그들이 트집을 잡아 논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들의 자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가난한 사람의 38년 계속된 병약함은 치료되었으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궤변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곧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바로 그 날은 안식일이더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네 자리를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 그가 그들에게 응답하되, 나를 온전하게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고 반박했습니다.

 

그 당시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케 하신 분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곧 인근 성전으로 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색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분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그분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신 것은 아름답게 간결하지만 그분을 향한 그들의 분노는 증가합니다. 차분하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느니라”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일찍이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일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에서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라는 기록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창조의 일을 쉬는 것이었으며 길 박사는 기록하기를 “그분은 그 이후로 안식일과 다른 날에도 언제나 일하시기를 계속하셨습니다. 세상을 붙들고 다스리며 인간의 계속되는 생존과 모든 피조물을 계속 유지하며 그들을 위해 제공하고 그들에게 그분의 섭리의 너그러운 시여(施與)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빛이 빛나도록 하고 땅에 소나기를 내리도록 하며 그분의 가장 보잘것없는 피조물들까지도 보살피고 보호하십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