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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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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벳바게 이름은 복음서에서 세 번 나오는데 모두 같은 사건과 연결되어 있어서 마을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 11:1, 마가복음 11:1과 누가복음 19:29을 보라.

 

벳바게는 감람산의 비탈에 작은 마을로 베다니에서 매우 가까우며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의 여행에 제한될 정도의 약 2,000규빗입니다. 이름이 “무화과의 집”을 의미하는 것에 보편적으로 동의하며 그 지역에는 실제로 무화과나무가 풍부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보게 이름의 의미보다 마을과 관련성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입니다.

 

벳바게를 언급할 때마다 구주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은 매우 주목할 만하지만 또한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예루살렘 행로에서 비켜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벳바게를 떠나실 때 많은 칭찬과 명백한 기쁨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분께서는 결국 그분의 마지막 고난과 거절의 곳이 될 도성을 향해 가는 그분의 굳게 결심한 길이었습니다. 그분은 때가 되기 전에 벳바게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환영이 있을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이 날이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그분의 승리의 입성의 날로 기억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그분께서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더라”(눅 19:28)고 적절히 말해졌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 없이
언제나 놀라움이 그분을 사로잡고

확고한 의지로 십자가를 향해
그분은 열린 눈으로 나아가셨다.

-I. Y. 이완

 

그분의 계획에 따라 그분은 제자들 둘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그분께 데려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분의 전지전능함으로 두 길이 만나는 곳에서 두 짐승이 문 곁에 매여 있을 것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막 11:4). 그분께서 사용하실 나귀는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새끼였지만 저항하지 않고 그분을 그분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은 결국 창조의 주님이셨으며,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않았어도 동물들은 인식할 것입니다. 그분의 사역의 시작하려는 직전에 40일 동안 그분은 광야에서 짐승들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하신대로 그것들이 이빨이나 발톱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야생 짐승들은 그 외로운 광야시절에 그분의 동반자였으며(막 1:13), 이제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새끼가 그분의 예루살렘 길에 그분을 공손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그분의 전지하심의 사례를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그분은 나귀와 나귀새끼가 누구의 소유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이 어디에 있을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분은 그것들이 매여 있지 않음과 허락도 없이 그것들을 데리고 가는 제자들에게 처음에 이의를 제기할 것도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전능하심에 그분은 완전한 통제를 하시고 제자들이 어떤 반대에도 어떻게 대답할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고 말하라. 그리하면 그가 즉시 그것을 이리로 보내리라”(막 11:3).

 

그런 다음 우리 주님의 동정심과 부드러움에 대해 주목할 작은 흥미로움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분은 사려 깊으신지. 그들은 어미와 함께 있는 묶여있는 나귀와 나귀새끼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분은 “내게로 그것들을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리의 동물이 그분을 시내로 수행하기에 충분할 것이지만 그분은 어미로부터 어린 새끼 나귀를 떼어놓지 않으시려고, 그래서 그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마 21:7) 왔습니다.

 

알버트 반즈가 이것에 도움이 되는 주석을 기록했습니다 “유대 지방에는 거의 말들이 없었고 그것은 주로 전쟁에서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생활과 여행에서 그것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나귀, 노새와 낙타는 여전히 대부분의 동부 국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말을 타는 것은 때때로 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노새와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왕과 왕자들은 평화의 시기에 그것들을 일반적으로 탔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타는 것은 계급과 존엄의 표시로 언급됩니다(삿 10:4; 12:14; 삼상 25:20). 솔로몬은 즉위할 때 노새를 탔습니다(왕상 1:33). 그러므로 이 방식으로 타는 것은 가난이나 하락을 의미하지 않으며 왕이 타는 적절한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시온의 왕이 그분의 수도-예루살렘의 성으로 들어가야 하는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귀 위에 자기의 옷을 올려놓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태울 때에 얼마나 큰 특권이 있었는가? 이 특권을 거부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펼치고 다른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들을 동일하게 폈습니다(요 12:13). 종려나무의 가지들은 승리와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그들은 길에서 이것들을 펼쳤습니다. 그것들은 벳바게로부터 기드론 골짜기와 예루살렘까지 감람산을 내려가는 먼지투성이 길에 카펫처럼 뒤덮었습니다. 그것은 침례 요한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 3:3; 막 1:3; 눅 3:4)고 외친 명령의 문자 그대로의 성취였습니다. 만약 도덕적으로 유사한 준비가 있었던 경우라면!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과 삶은 여전히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감동적인 장면에서 군중은 벳바게를 떠나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좁은 길에 붐볐습니다.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에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님이 그 성에 입성하는 승리의 입성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곧 그분은 거절되고 그분의 외로운 길에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다시 성 밖으로 끌려나와 고독하게 골고다로 가는 길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 기억에 남는 여행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된 고대의 예언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묵상을 위한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