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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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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비보셋과

 

삼하 9:6-8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사무엘하 9장에 있는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읽으십시오.

 

나와 므비보셋의 같은 점이 무엇일까요?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인 시대로나, 이름으로나 우리는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므비보셋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실, 모든 진실한 신자들과 므비보셋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 모두는 어떤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어떤 왕에 의해 내쫓겨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귀빈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비슷한 경험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경말씀 속에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담아놓으신 이유 중 한가지임이 분명합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9장에서 다윗이 므비보셋을 돌아보고 부양한 이야기는 모든 성경에서 가장 가슴 뜨거운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다윗 왕이 가난한 절름발이 므비보셋에게 보인 사랑과 자비는 의리 그 이상의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돌아보아야만 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의 처지에 대해 많은 염려를 하여 아무 조건도 없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다윗이 베푼 므비보셋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훌륭한 예입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려놓으신 그림에 우리는 "므비보셋과 나"라는 제목을 붙여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므비보셋은 다윗보다 더 위대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당한 바로 "나"로서 이 므비보셋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손자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훌륭하게 시작했지만 후에 주님에게서 떠나버린 왕입니다. 사울은 주님 좇기를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름 부은 왕인 다윗을 없애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사울 왕가 사이에는 이간과 대립이 있었습니다. 폐위된 사울 집의 한 가족으로서 므비보셋은 다윗 왕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새로운 왕가가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왕은 왕좌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대적을 신속히 처형하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므비보셋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그를 왕자요 자기 가족의 하나처럼 대우하였습니다. 궁중 안에 폐위된 왕가의 절름발이 가족이 있다는 "당혹감" 조차도 므비보셋에 대한 다윗의 은혜로운 처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분에 넘치는 자비와 당황스러울 정도의 은혜에 대한 너무도 훌륭한 예화입니다.

무너진 사울 왕가는 타락한 인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조물 가운데 왕의 신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처럼, 사람은 불순종함으로 주님에게서 떠나 자신의 왕의 신분을 죄 가운데 던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1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와 그 형벌인 죽음이 모든 인류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므비보셋처럼 망한 왕가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므비보셋처럼 우리는 추방과 죽음의 선고 아래 있는 혈통에 속하였습니다. 또한 므비보셋처럼 우리는 그 곤경에서 우리 자신을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저는 것은 그의 무력한 모습을 더 크게 해 줍니다. 므비보셋을 불구로 만든 그 떨어짐은 아마도 우리의 타락한 상태를 부분적으로나마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삼하 4:4 참조). 므비보셋의 이름은 타락한 사람에 대한 묘사를 덧붙여줍니다. 그 이름은 "내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 모두는 이 이름이 "나"를 잘 설명하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완전히 정복된 멸망한 사울 왕가의 친족이었기 때문에 이간과 대립으로 다윗에게서 분리되었습니다. 다윗이 자신과 므비보셋을 갈라놓은 이 모든 장애물들을 넘어선 것과 같이 하나님도 우리와 화목되기 위해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셨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이간과 대립과 적대의 모든 장애물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로 넓히셨습니다. 골로새서 1:21-22는 이 진리를 정확하게 담고 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우리는 다윗이 먼저 므비보셋을 찾아 나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고하신 우리 주님의 특징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습니까! 주님은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구성원인 우리는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선한 것"("우리의 형상을 따라 지은"바 된 어떤 신적인 것)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더듬어 나아갔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무한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실제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시기 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므비보셋이 다윗을 대한 태도와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여 대면을 피하기 위해 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자신을 찾고 찾은 왕의 사랑과 친절을 알고 깊은 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눅 19:10) 오신 왕의 사랑과 연민을 깨닫고 경험하기 위해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9장 1절과 7절에서 다윗이 요나단 때문에 므비보셋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그를 찾은 것을 알게 됩니다. 요나단은 므비보셋의 아비요 전 왕인 사울의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 왕가였지만 그와 다윗은 가장 훌륭한 친구요 피차 우정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 20장 참조).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면 요나단의 집에 자신의 인자를 결코 끊지 않겠다고 요나단과 맹세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의 맹세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왕조"와 맺으신 최고한 사랑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사실 요나단의 이름도("여호와가 주셨다"는 뜻) 이러한 부분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악된 사람들에게 사랑의 맹세를 무조건적으로 약속하신 것을 보게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범한 바로 뒤에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을 구원할 구속자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실 때 약속해 주신 오실 구속자에 대한 첫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최고하며 불변하는 사랑은 노아의 때에 인류를 보존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또다시 약속하실 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구속자에 대한 약속은 구약성경 전체에 반복되고 있으며, 그 구속자가 나실 이스라엘 민족을 놀랍게 보존하신 것은 죄범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한 사랑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시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귀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단이 사울의 가족으로서 다윗의 사랑과 므비보셋의 필요 사이의 고리가 된 것처럼, 주 예수님께서도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너무도 큰 필요 사이의 필수적인 고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히브리서 2:17절에서 보게 됩니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사무엘하 9장 7절에서 우리는 사울과 사울의 왕가에 속했던 모든 왕의 재산이 므비보셋에게 왕족의 수준만큼 돌려지게 되었음을 봅니다. 이는 타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사형선고 아래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신분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더 나은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관대함의 크기가 에베소서 1:3-6에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다윗이 자신을 찾아낸 것에 대한 므비보셋의 태도는 "므비보셋과 나"라는 그림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계획을 알기 전에도 엎드려 절하며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거나 자신이 사울과 연관된 것을 변명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동일하게 우리도 하나님께 자비를 얻기 위해 "죽은 개"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히브리인의 문화에서 죽은 개보다도 더 낮은 위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겸손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본주의적인 교만과 거만함은 왕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제 왕의 상에서 먹는 므비보셋들인 우리는 왕의 공식 초청장을 가지고 사랑과 연민으로 그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므비보셋과 나"라는 그림 안에서 우리와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데이빗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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