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너희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3)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이 과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이 우리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에베소서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디도서 3:15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하셨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성경이 빌립보서 2: 12 말씀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마치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일한 저자가 모순된 말을 하는 것과 같은데, 결과적으로 말하면 사도바울이 이 세 성경, 에베소서, 빌립보서, 디도서를 모두 썼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인 모순(대조관계)

우리는 바울이 이 서신서들을 쓸 때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모순되는 말을 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성경의 어떤 저자도 자기 혹은 성경의 다른 저자와 모순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순되는 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경의 절대적인 저자가 되시기 때문에 성경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문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구절에 대한 보다 나은 해석은 종종 약간의 차이가 있는 문제와 구절들을 서로 잘 조화시킵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바로 빌립보서 2:12 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방법은 그 성경을 쓴 이유를 살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의 이유, 즉 그 성경을 쓸 당시의 특별한 상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쓸 당시 저자가 있던 곳은 어디인가? 저자와 독자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들은 무엇인가? 그 곳에 바로잡아야만 하는 특별한 문제가 있었는가? 특별히 저자가 마음에 두고 있던 관중이 있었는가? 그 성경을 쓸 수밖에 없게 한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가? 등의 그 성경을 쓴 이유(상황)를 알면 우리는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하거나, 성경의 구절들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를 보다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가능한 한 가지 해석

빌립보서를 쓴 이유(상황)를 논하기 전에 빌립보서 2:12의 표면에 나타난 모순성을 다음과 같이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하라'고 하지 않고,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여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두운 불신의 세상에 우리의 구원의 빛이 비춰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그 빛을 만드신 분입니다(고후 4:6), 우리는 이제 '사람들에게 빛을 비취게 하여 저희로 당신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할'(마 5:16)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빛을 '어그러지고 굽은 세대 가운데, 하늘의 별과 같이'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빌 2:13)'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취하고, 주님의 실수 없는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완성합시다.

표면상으로 이것은 잘된 해석 같습니다. 확실히 표면적인 모순은 해결되었고, 그 장(章)의 다른 말씀과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구원을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신약성경의 절대적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성령으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시작하신 구원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고 전생애(生涯) 걸친 성장과 도전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을 완성한다'는 접근은 말씀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평이하고도 간단한 방법의 하나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서신서를 쓸 때, 그를 둘러싼 상황(이유)을 안다면, 우리는 좀 다른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쓴 이유

빌립보서를 쓴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4장에서 우리는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의 형제가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중에 빌립보로부터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온 것을 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교회로부터 사도에게 주는 재정적인 선물 뿐 아니라 소식도 가져 왔습니다. 이 교회는 사도 바울과 이방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님의 일을 자원함(1:5,7)으로서 사랑과 섬김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모범적인 교회로서 그들은 대기근(大饑饉)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과 개인적인 헌신 등에 기여하였습니다(고후 8:1 -5).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공급에 대해 감사하는 말과,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돌보고 계시며(4:10-19) 선을 위해 갇힌 중에 이기게 하심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1:12-26).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소식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2차, 3차 전도여행 중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전심전력하였었습니다. 그와 같은 초기의 말(행16)로부터,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가 마음의 평안을 깨는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빌립보에는 수평적으로 두 가지 두드러진 위험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유대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위협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는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간단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필수 요소 중에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그릇된 가르침이 빌립보의 교회에 파고들었지만, 바울은 이 유대주의 비그리스도인의 위협적인 태도에 대해 강도 높은 말로서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

다른 한 가지는, 빌립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분열이라는 위험입니다. 4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활력 있고 은사가 풍부했던 이 두 자매들은 어떤 점에선가 서로가 서로의 눈을 마주하여 볼 수 없게 되었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편을 들어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 가운데 당파가 생기고, 교제가 방해받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쟁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교리상의 차이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확실한 것이 없이 이교도를 대하듯이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빌립보의 교회가 직면했던 분열은 완벽주의(3:12-16)를 따르는 신자들과 자유주의(3:18-19)를 따르는 신자들간의 분열이었을 것이라고 재의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면에서 그 균열은 모임의 사간, 모임의 장소나, 그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세세한 것들의 관점과 생각의 차이에 의해 생겼을 것입니다. 요즘도 많은 교회들이 이와 같은 하찮은 것들로 갈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불행하게도, 임무를 완수하고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나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분열을 밝혀지지 않은 채로 놔두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가 성경 말씀을 교회의 연합을 저해하는 모든 사사로운 일에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서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은 흘려 버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됨을 위한 부르심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4:2)'고 하는 직접적인 충고를 하는 것 외에, 빌립보의 성도 전체에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이라(4:5)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들의 타인에 대한 생각은 긍정적인 것, 오직 긍정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진실된 증거와 경건하고 옳으며 정결하고 사랑할만하여 칭찬할 만한 성품과 행동이 다른 성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의 특징이 되어야 했습니다(4:8). 그들은 험담을 버리고, 일방적인(편협된) 증거를 떨쳐버리고, 다른 성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속에 있는 성향을 그쳐야 했습니다. 긍정적인 특징과 칭찬할만한 행동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것이 빌립보의 성도들을 하나됨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칭찬할 만한 일에 대한 생각과 긍정적인 성향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의 우리도 하나됨으로 이끌 것이며, 특별히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제나 자매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1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고 권면하였습니다. 2장에서는 형제, 자매들에게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보라(2:2-4)"고 강권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헌신에 대한 극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주 예수십니다(2:5-8). 그러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 아름다운 성경말씀의 핵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는 하나의 실제적인 말씀에 있습니다. 이제 실제적으로 바울은 12절 말씀에서 빌립보의 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로 이것 - 교회의 하나됨의 손상 - 이 성경을 쓰게 된 특별한 이유(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야(완성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낳은 해석어떤 방법으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요? 교회의 불화합의 문제가 사라지거나 혹은 최소한 감소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의 열매가 타인에게 작용하게 해야 했을까요? 다른 말로 얘기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그들에게 주신 사랑과 인내와 관용과 용서를 취하고, 다른 성도를 향하여 그것을 완성해야 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하나됨을 돕고, 빌립보 교회가 나뉨으로써 생긴 상처를 치유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상황을 볼 때, 이 해석이 분명히 바울이 처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쓸 때 마음에 가진 것과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이 구절을 쓸 때 그가 생각한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살펴봐야 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항상 "우리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사용된 영어나 히브리어가 마찬가지입니다. 영어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위난이나 생명의 위협으로부터의 탈출, 혹은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파산한 농부가 적절한 지불 계획을 성공적으로 행함으로써 저당으로 넘어갈 뻔한 그의 농장을 구했다(보전했다). -- 그는 구원을 완성했다 --"라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1:19에서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감옥으로부터의 놓임이라는 의미로 말했었습니다. 그른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는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그의 현재의 투옥생활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구원"이라는 히브리어가 빌립보서 2:12과 1:19에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능한 것은 바울이 빌립보서 2:12을 쓸 때에 '구원'이라는 단어 속에 가지고 있던 뜻은 개인적인 영혼의 구원이 아니고 지역 교회의 분열이라는 위험 속에서의 탈출이라는 뜻이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보전(교회의 구원)하기 위해서 정신적인 분열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끝까지 수행해야(이루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했는데, 왜냐하면 이 문제는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분쟁은 어느 교회에게나 뼈아픈 일이지만, 특별히 젊고 성장하는 교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행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교회의 연합을 완성할 수 있도록 힘 주실 것(2:13)과 이것의 완성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사용해서 일일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순서를 정해서 자세히 말할 수 있었지만, 빌립보의 성도들 자신이 '이루어 내도록' 권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지침(2:2 -4, 4:4-9)을 주었으며 따라야 되는 모델로서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태도(2:5-8)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다른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했습니다(2:14). 이기주의와 분쟁과 당면한 분열로부터의 '구원'의 결과는 그들의 하나됨의 증거가 모든 세상에 비췸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2:15).

 

오늘에의 적용

빌립보서 2:12 말씀의 이와 같은 해석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분명합니다. 이단적인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다른 견해가 '개인적인 견해'의 차원에서 생기고, '교제에 금이 가는 사태'로 논쟁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면, 성도들은 함께 앉아서 교회의 하나됨을 보전하기 위해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시간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건, 음악의 방식이나 주일학교가 모이는 곳의 페인트 색에 관한 것이건, 혹은 대 집회 장소의 카펫트에 관한 것이건. 해결책은 '이루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분쟁이 없는 척 하지 마십시오. 화합하지 못하는 일들을 양탄자 밑으로 밀어 넣지 마십시오. 이루어 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의 하나됨이며, 따라서 모든 분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은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참한 상황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자존심을 버리고, 개인적인 야망을 버리는, 또는 우리의 "특별한 계획"을 희생하는 등의 모든 부분에서의 심각한 태도 변화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희생과 노력의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께 영광을 들립시다. 그리고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는(2:15)" 우리의 임무를 완수합시다. 자, 우리의 구원을 이룹시다 !

- 데이빗 리더

 

 

'주옥같은 말씀들 > 데이빗 리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만과 편견을 경계하라  (0) 2015.07.12
교만의 시작과 끝  (0) 2010.08.19
므비보셋과 나  (0) 2010.07.27
삶의 기쁨  (0) 2010.07.10
실패가 끝이 아니다  (0) 2010.03.20
바람에 투자하면  (0) 2010.03.09
다섯 가지 은유  (0) 2010.02.12
모든 것이 깨끗하나  (0) 2010.02.05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