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실패가 끝이 아니다

FAILURE IS NOT FINAL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56-62)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 15:36-40)

당신은 금년초에 어떤 결심을 했습니까? 그 결심들이 깨지지 않았나요? 다이어트나 운동 등의 결심들도 몇 주만에 희미해집니다. 아마 신앙적 결심들도-성경 일년일독과 같은- 잘 해내지 못하고, 당신은 훈련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낙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희미해진 새해의 결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큰 실패로 고심하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용서받기 힘든 일로 주님을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죄책감이 들고, 반성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절망적입니까? 우리 주님을 위한 일에 당신이 쓸모없다고 느끼십니까? 아닙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 실패가 끝은 아닙니다.그리스도인의 삶 중에 어떤 중대한 실수라도 회복받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실수가 정당화되거나 눈감아 줄 수는 없지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기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실수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뉘우치는 자에게 자비롭게도 회복케 하십니다(시 103:8~14). 하나님은 신자의 절망적인 삶을 회복시키고 아름답게 가꾸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신자의 실수가 하나님을 위한 삶의 끝이 아니라는 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외 믿음의 조상들과 모세, 다윗, 엘리야, 요나 등 여러 믿음의 영웅들의 삶의 실수들을 상고해 보십시요! 여기서 우리는 신약속의 두 인물 베드로와 마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실수사도 베드로의 삶 중에 잘 알고 있는 얘기 중 하나는 주 예수님을 부인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베드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더 신실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만찬 저녁에 베드로는 그의 믿음을 확신하여,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 할 때, 주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힘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몇 시간 후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주님일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막 14:71). 곧 닭이 울고, 잡히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실 때 베드로의 그 죄책감과 후회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뜰에서 나아가 심히 통곡할 때, 그는 그의 실수로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니라고 부정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알지도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으로, 또 십자가에 못박히러 끌려갔을 때, 베드로는 아마 그의 슬픔과 죄책감을 말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복하지만 베드로의 실수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그분은 베드로를 위한 위대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조반을 먹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의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주님은 베드로의 생각과 죄책감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셨고, 질문과 대답으로 어떻게 베드로를 조심스럽게 회복시키실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친절한 치유는 이사야 42:3 에서 주님에 관한 놀라운 구절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라고 베드로에게 묻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두 가지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그리스어로 "phileo"라는 단어는 "친절한(부드러운) 애정(사랑)" 을 가리키고, "agapao" 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자발적인 자기 부인(자제)" 의 의미를 포함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첫 번 째, 두 번째 질문할 때 "agapao" 단어를 사용하셨고, 세 번째 물으실 때는 "phileo" 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 모두 "phileo" 단어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마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람어는 이 두 그리스어와 유사한 뜻의 단어들은 없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요한(그 대화 중에 함께 있었던)은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본질(실체)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이 두 그리스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베드로의 성급한 맹세(주를 부인하지 않겠다)와 그 후의 실수(주를 부인함)로 인해 그는 아마 주님에 대한 사랑을 "agapao"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지닌 강렬한 사랑)로 고백하기에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위한 계획을 여전히 가지고 계셨으며, 완전한 모사(자)로서, 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수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모사)은 영향력이 컸습니다. 베드로를 하나님께서는 크게 사용하셨습니다!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감옥과 죽음,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를 희생하도록 인도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대하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중에 베드로의 실수와 회복을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의 실수

요한 마가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는 기독 초기 시대부터 사도들을 동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도망갔던 젊은 남자가 마가 자신일 가능성도 있다(막 14:51-52). 초기 신자들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에도 이 집으로 찾아왔으며(행 12장), 벧전 5:13 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믿음 안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베드로가 마가를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을 인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드로와 마가 사이에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실히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나바는 마가의 생질(사촌)이었고(골 4:10), 마가가 사도 바울에게 소개된 것도 바나바를 통해서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전역에 퍼진 흉년으로 유대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안디옥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행 11:27-30).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갔을 때, 마가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마가는 구브로 섬 사역 당시 그들과 동참했었지만 전도팀이 중앙 아시아 지역 내로 출발할 당시, 마가는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 집으로 갔습니다(행 13:13).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마 그는 집이 그리웠거나, "아시아 독감" 같은 병에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는 전도 여행의 어려움(고생)을 원치 않았을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사실, 앞으로 떠날 전도 여정이 강도가 들끓는 험한 산들을 지나갔어야 했습니다. 아마 그는 통솔권이 사촌 바나바가 아닌 젊은 청년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미묘한 변화가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과 어떤 신학적 견해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마가는 그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과 전도단에서 물러났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 실수가 마가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두고 심하게 다투었고, 그 결과 두 노련한 전도자들이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중앙 아시아쪽으로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어쨌든, 이전 마가의 불참(이탈)으로 두 개의 전도팀으로 나누어진 것은 마가의 실수를 정당화하거나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실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회복성경은 바나바와 마가의 구브로 섬에서의 사역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마가의 그 이후의 활동은 그의 실수가 그의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마가를 주님의 일을 하는데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약 10년 후 바울은 로마에서 감금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성도들과 지역교회로 권면과 위로의 편지를 썼고, 우리는 여기서 마가가 바울의 은혜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의 전도단의 소중한 구성원임을 보게 됩니다.

빌레몬서에서 마가는 바울의 개인 문안 인사에서 다른 팀들의 성도들의 이름과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몬 1:24). 골로새서 4:10 에 언급된 글에서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 마가가 이르면 영접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풀려났을 때, 마가는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로마에 갇혔을 때 쓴 마지막 편지에서 마가가 다시 한 번 언급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썼습니다(딤후 4:11). 마가의 처음 실수는 단지 그의 믿음의 길에 일시적인 퇴보였습니다.

마가의 실수가 끝이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한 성경의 책 중에 하나를 기록하도록 그를 택하셨다는 것이며, 마가가 쓴 복음의 주제는 "온전한 종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위대한 주제의 영감을 받아 그분을 섬기도록 마가를 특별히 택하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패한 삶을 회복시키실 수 있다는 증거가 더 이상 필요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장래 주님의 일에서 마가를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는 성도들의 과거 실수를 붙들고 그들의 사기를 꺾고 낙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잘못한 그들을 영원한 "2등급 그리스도인" 이라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의 형제와 자매들의 실수가 반드시 영원한 인격적 결함인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시는- 성도들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인격을 매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엡 4:32, 요일 1:9).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 교제와 봉사하는 일에 회복받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실수가 그리스도와 봉사의 영역에 영원히 영향을 미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한 신자를 구원과 앞으로의 신앙 생활에서 제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신자들에게 하나님보다 더 냉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수한 성도의 신앙 회복은 영적 동료인 성도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라고 썼습니다. 그리스어로 "회복하다" 라는 단어는 "뼈를 맞추다", "그물을 고치다"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이것은 회복된 신자가 앞으로의 그리스도의 일에 유용할 것이라는 명확한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베드로와 마가의 삶 중 이러한 사건들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실수없는 삶을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침륜과 의심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 눈덩이처럼 몰려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셨다고 잘못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잘못을 용서하시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믿지 않음으로 그분의 인격을 비하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예들이 용서된 잘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수가 끝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마가의 삶이 이 사실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실수가 끝은 아닙니다!

-데이빗 리더

 

 

'주옥같은 말씀들 > 데이빗 리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만의 시작과 끝  (0) 2010.08.19
므비보셋과 나  (0) 2010.07.27
삶의 기쁨  (0) 2010.07.10
너희 구원을 이루라!  (0) 2010.03.26
바람에 투자하면  (0) 2010.03.09
다섯 가지 은유  (0) 2010.02.12
모든 것이 깨끗하나  (0) 2010.02.05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0) 2010.01.30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