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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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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부터 현재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우리가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성경 공부반의 학습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번 주에 공부할 부분은 위의 말씀을 포함하는 로마서 1장입니다. 실제적인 적용을 꼭 포함시키고 싶고,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구절이 오늘날에 의미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예를 찾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좋은 예일까요?

세 가지 예를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대학 구내 식당이나 음식점에서 부끄러움 없이 주신 음식에 대해 머리를 숙이고 감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마 문지르기' '눈썹 긁적거리기'등의 기도 위장술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예는 길거리나 대학의 공공장소에 서서 그리스도인들이 무리를 지어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런 자리에서 빠지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예는 어떤 대학의 철학 강의 시간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끝까지 남게 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러면 로마서 1:16의 말씀이 오늘날 어떻게 적응되는가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예는 어떤 것입니까?

시간 관계상 성경공부 반에서는 한 가지 밖에 예를 들 수가 없다고 합시다.

 

가장 좋은 예

여러분은 아마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16의 실제 적용으로는 세 번째 예가 단연코 적절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해석학상 바람직한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학문적인 용어라고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해석학이란 저자가 사용한 단어나 문맥의 원뜻을 해석하거나 판단하는 학문입니다. 해석학상 바람직한 적용을 선택한다는 말은 그 당시-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저자가 나타내는 의미를 판단하기 위해 문맥을 연구하고, 현재-오늘날의 상황-에 있어서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적용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로마서 1:16을 주의 깊게 문맥을 따라 해석한다면 자연히 그 당시에 1세기의 청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에 보다 가까운 오늘날 적절한 적용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번째 예가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그 당시의 상황에 한층 더 유사한(수평적으로 대비관계에 있는) 현재의 적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 두 예를 사용한다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세번째 예가 해석학상 보다 더 적절합니다.

 

그 당시를 확실히 하라

안전하고 분별 있는 성경해석은 항상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경의 말씀이 기록될 그 당시의 분명한 의도를 살펴보기도 전에 그 성경 말씀에 적접적으로 접근해서 임의로 현재에 적용을 결정해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성경은 원래 누가 읽도록 쓰여졌습니까? 성경 -성경 각 권과 본문- 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과 어떻게 다릅니까? 앞뒤의 문맥에 그 당시의 독자들을 향한 저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까? 위의 과제를 다하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 당시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결정한 다음에야 비로서 현재를 위한 본문 말씀의 가장 좋은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해석의 한 원칙으로서, 언제나 그 당시로부터 시작해서 현재로 해석하는 목적은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제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자기해석(eisegesis)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해석이란 우리가 성경을 성령님이 의도하지 않은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히 성경의 저자가 성경을 집필할 때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오늘날의 모든 종류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주의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성경 구절을 엉뚱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 이런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은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해석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해석한다는 해석상의 원칙을 따른다면 현재와 완전히 다른 그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씀으로부터 현재에 맞는 특별한 적용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보다 뛰어난 세계관

이제 다시 본문 로마서 1:16으로 돌아가서 왜 철학강의 시간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나누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다른 두 가지 예, 즉 음식점에서 기도하거나 공공의 장소에서 전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예가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시다. 바울이 1세기의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그 당시의 상황과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1:11-15에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를 원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계획이 방해받고 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로마서 15:20~22도 읽으십시오). 비록 로마 교회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1:18) 되었지만, 바울은 그 때까지도 말씀으로 그들을 섬길 기회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5에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기를이라고 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단순한 복음 전도 이상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더 많은 것을 배움으로서 믿음 안에서 더욱 강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원했습니다(1:11).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가 드러납니다(1:17). 바울은 여전히 로마로 갈 작정이었지만(15:23-24),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복음에 위대한 진리들을 편지를 통해 로마 성도들에게 전달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로마서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모든 함축된 말로서 분명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그리이스 · 로마의 철학이라는 이교도적 세계관으로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 위에 견고히 세워지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도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불분명한 결말이나 지적인 취약점이 없으며, 모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되며 모든 이교도적인 세계관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확신하길 원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진리이며, 우주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다른 어떤 세계관 보다 우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고 변화시킵니다. 그 진실성과 능력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세계관이라도 격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당시의 철학과 회의론적 세계관과 비교해도 우월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라는 말속에 있는 바울의 원래 생각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배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지적으로 어색하게 보이고 인식의 철학적 체계에 약하다는 생각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학술적인 경쟁에서 당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복음으로부터 움츠려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세계관 보다 철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에의 적용

이제 철학 시간에 기독교적 세계관 발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로마서 1:16의 세 가지예 중에서 가장 적절하다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식당에서 기도하는 배짱 혹은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용기는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을 쓸 때 의도했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이 현대의 어떤 세계관보다 철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과 보다 잘 일치합니다(수평적 대비 관계에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맞서는 세계관이 자연주의이거나 실존주의이거나 혹은 New Age 철학일지라도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하나님의 복음-정신나간 종교적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철학적 체계와 비교해서도 항상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믿음이 약간 지적으로 열등하거나 대답하기에 뭐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떨굴 필요가 없습니다.

 

성서적 원리

언제나 그 당시에서 현재로라는 해석학상의 원칙은 논리적일 뿐 아니라 성서적입니다. 이것은 초기의 그리스도인이나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도들은 혹은 21세기의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 교수들의 창작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성경해석의 원리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말씀을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인용할 때는 언제나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청중에게 현재로의 적용은 어느 정도 구약성경 말씀의 그 당시 상황과 일치하였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의 의미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숙제를 하기도 전에 구약성경의 구절을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적용은 언제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구약성경을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적용하였는지를 보기 위해 로마서에 있는 다른 말씀을 봅시다. 로마서 10:15에서 바울은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여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는 이사야 52:7의 말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2:7의 말씀은 포로로 갔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유대인들이 비록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사로잡힐지라도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복음이었습니다. 로마서 10:5에서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적용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사야의 예언을 억지로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의 적용이 자연스럽게 수평적인 대비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사탄의 세력권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로마서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사야에서 자유와 평화의 소식을 포로들에게 전하게 될 사람을 축복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축복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성경말씀을 적용할 때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라는 성경해석상의 원칙을 준수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구약의 말씀을 신약의 그 청중들에게 인용할때는 언제나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가 어떤 규칙이건 원칙이건 적용을 위한 변형 혹은 적용 그 자체는 자연스러우며 수평적 대비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언제나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말씀을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 중요한 해석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거나 전할 때는 언제나 그 당시로부터 현재로 적용합니다.

- 데이빗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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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