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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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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Alves, Sr

방언의 은사는 확실하게 성령님의 활동하시는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필요하거나 여전히 효력이 있습니까?

 

바울 서신들을 통하여 성령님의 은사들이 다섯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정경의 발전과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2장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다음에 로마서 12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이러한 장들 중 초기에 세 번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2장(8-10,28,29-30).

 

성경적 방언 은사의 사용은 그쳤지만 특정 구절은 오늘날 은사주의 집단들에서 행하는 것이 초기 사도 시대에 말한 방언과 동일한지 궁금해하는 진지한 탐구자들을 의아하게 만듭니다. 이것들은 수수께끼 같은 구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 새 언어들로 말하며”(막 16:17). 이들 “새 언어들”은 오늘날 말해지고 있는 통역할 수 없는 말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새로운”(kainov",카이노스)이란 단어는 말하게 될 방언이 말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언어들은 비록 말하는 자가 알 수 없어도 듣는 자들에게 이해되고 친숙한 언어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이것을 증명합니다(6-8절); 오순절에 말했던 방언은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개종자에 의해 분명히 이해되는 평범한 언어였습니다. 방언의 통역에 동반하는 은사는 사도행전 2장에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즉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군중은 그들 자신의 “옛” 모국어로 메시지를 들었고 그 언어는 이전에 결코 배우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들을 유창하게 말했던 사람들에 의해 들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로 말할지라도…”(고전 13:1).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천사의 언어를 사용합니까? 바울은 몇 가지 가상적이고 극단적인 예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합니다(즉, 모든 믿음을 가지고 모든 신비함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면서 천사의 모든 인간적인 언어와 방언을 알고), 심지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사랑 없이는 아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더 전체 성경에 걸쳐, 창세기(16:7-12)에서 계시록(22:8-11)까지 인간과 천사의 교통은 항상 인식할 수 있는 지상의 언어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고전 14:2,4, 또한 13,14,19,27). “알 수 없는 방언” 표현이 오늘날 우리가 듣는 모순된 말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제14장에서 “알 수 없는”이라는 단어가 발생할 때마다 기울임체로 나타내고 있는데(KJV) 이는 헬라어 본문에는 없지만 번역자들이 보충된 영어 단어를 제공했음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오순절 경험과는 다른 무언가를 다루고 있었다고 가르치기 위해 잘못 사용되어왔습니다. 고린도 지역 교회에서 나타내었던 언어는 소수였으며, 헬라어는 대다수에 의해 말해졌을 것이며,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유대인들에 의해 말해졌고(16:12), 라틴어는 로마 성도들에 의해 말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16:17).

 

예를 들어, 만약 고린도 형제가 이집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면 청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통역의 은사를 가진 어떤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집트어에 대한 통역의 은사는 예루살렘에서 필요하지 않았지만(행 2:10) 고린도에서는 필요했을 것입니다(고전 12:10,30; 14:5,13,26-28).

 

통역이 없는 상태에서 형제가 방언으로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자신만 덕세움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알 수 있는 지상의 언어로 말을 했을지라도 오직 하나님과 그만이 이해할 것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람이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성령님은 또한 새로운 진리의 의미를 그 사람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역 없이 기도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덕세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의미했습니다.

 

“알 수 없는 방언”은 개인의 헌신에서 혼란스러운 수다를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심지어 성경적 교회 집회에서 황홀한 횡설수설이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타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전 14:39). 이 구절은 오늘날 방언 사용을 금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칩니까?

 

이 고린도서는 서기 55년경에 바울에 의해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이 고린도에서 사용되고 있었지만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갈라디아서가 순환되고 있고 아직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는 50년은 더 경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에 일시적 성격의 방언의 은사와 다른 표적 은사들은 자연히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전파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 주었을 것입니다(고전 13:10, 유 3), 따라서 표적 은사들이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세기의 중간에 고린도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오기 전에 은사의 사용을 금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행 2:4). 방언의 은사는 신자가 성령님의 침례를 경험했다는 필요한 증거입니까?

 

성령 침례는 (성령“의” 또는 성령“으로”가 아님) 오순절에 한 번 발생되었던 사건이었으며(고전 12:13) 그 날 지상에 살아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연결시켰습니다. 그 날 이후 다른 모든 신자는 회심의 순간에 이 몸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신자들은 특별히, 다락방에서 또한 그날에 성령님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많이 언급을 하는 사람들은 또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있었던 것을 잊고 있습니다(2-3절). 성경 어디에도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신자들 안에 일어났다는 주요 증거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엡 1:13).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고전 14:21). 이사야 28:11-12에서의 이 인용문은 오늘날 우리가 듣는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증거입니까?

 

창세기 11장과 이사야 28장에서 하나님의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사용은 불신 때문에 심판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고전 14:22). 신약에서 사용된 방언의 세 가지 역사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사도행전 2,10,19장) 믿지 않는 유대인 청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28장에서와 같이 신약에서 방언의 사용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관한 심판의 표적이었습니다. 그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 신자들에게 복이 될 수도 있거나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은 하나님의 충분한 말씀과 모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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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