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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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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 12~18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쓸 적에는 만년이 되어서 14절의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고 해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기억해 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듣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여기에 생각하려 함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배운 것을 되새기면서 계속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태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광 중에라고 말하고 마지막에 영광을 받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대로 기억해 내면서 사람들에게 격려를 했을 것입니다. 영광의 주를 베드로가 본 것입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하늘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 그 육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8절에서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라고 했지만 19절에서는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즉 다른 말로 말하면 목소리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격했던 그 일보다도 예언 즉 말씀이 더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신약성경전체를 생각할 때 사도들이 활동할 때는 신약성경이 지금보다는 분량이 적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러 갈 때마다 반드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신약의 나중 시대에 성경의 사본을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카톨릭의 수도원의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성경의 사본을 베꼈습니다. 이제 시대가 많이 지나서 구텐베르그라는 사람이 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활자와 인쇄술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해서 그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제라고 불리는 신부들만 성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국에서는 딘텔이라는 사람이 원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딘텔이라는 사람은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그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영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어성경,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국어 성경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본 베드로가 직접 본 그 영광보다 더 확실한 예언 즉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엄청난 경험을 개인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베드로는 그만 말을 잘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되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라고 그만 말을 잘못해버렸습니다.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한 자격으로 그만 다루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었습니다. 그것을 고백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님을 보았을 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한 입장으로 그만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 때 구름이 가리워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약성경은 놀랍습니다. 여기서는 엘리야도 모세도 아니고 나의 아들인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예언은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때부터는 이 분에게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구약성경에서 여러가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해서 보아 그것이 모임이라던가 그림자라던가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말을 들으라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는 깊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구약도 중요하지만 신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권유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은혜는 율법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요한복음 1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의 은혜는 메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위에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부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추구하고 구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메마르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분을 배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최초에 요한복음에 있는대로 동생으로부터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누가복음 5장에 따르면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접근해 오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있었지만 물고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리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복되게도 베드로는 피곤했겠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속을 보실 수 있는 분이 자신의 속을 보실 수 있다고 베드로는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다 속을 아시는 분이 내 속도 알겠구나라고 베드로가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물과 배를 던져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은 베드로를 사도로 쓰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면에서 뛰어나지만 때때로 실수도 합니다.

어느 한 때 정세를 받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도 세금을 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세는 성전세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도 베드로는 낸다고 말을 해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으시려고 물고기를 잡아서 나오는 돈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왜 고기를 낚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왜 베드로에게 고기를 낚아서 그 입에서 돈을 가져다가 드리게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 드릴 때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수고한 수고의 수입을 가지고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받으러 온 사람도 실족시키지 않으시려고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너무 열심인 나머지 예수님보다 앞서갔습니다.

베드로는 헌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를 때 배와 그물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가족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즉 버릴 것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예배당이라고 불리는데 있는 사람들 중에는 힘이 있고 젊을 때 일을 하고 정년퇴직을 한 다음에 전심으로 나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좋은데 전심으로 나서는 사람으로서는 버리는 것이 없는 것은 이상합니다. 저는 젊은 형제들이 전심으로 일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장래 인생을 주님께 맡기고 자신의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원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별로 은사가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 사람은 토목 일 중에 미장이 일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미장이 되는 형제님이 일을 하러 갔을 때 그 때는 먹을 것이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먹고 남은 것을 나누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위배되는 것인데 반해서 먹기 전에 먼저 나누어주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원칙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원리를 따라서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은 실례라고 그 형제님이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헌신인데 헌신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베드로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순종하는 것을 즉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고기를 잡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에도 주님을 따랐습니다.

요한복음 21 19~21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장면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나타나셔서 가르치신 장면의 하나입니다. 이곳에는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순교에 대해서 가르치신 대목입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에서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베드로 자신은 순교하지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어떻게 되던지 너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다음에 이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으로써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보지 말고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은 자주 남을 보지 않습니까? 나에 관한 주님의 뜻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일찍 하늘나라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늦게까지 땅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그 삶 속에 환난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없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생애에 있어서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반듯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사도행전에 들어와서는 베드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 때는 베드로는 더 이상 지지 않습니다. 전도를 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권위도 없는 사람이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잠잠하도록 탄압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 말을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히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변했습니다. 한가지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보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에도 베드로를 가르치셨고 베드로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명백하게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명백하게 말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인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국열쇠를 주님이 주신다고 하셨는데 한 면에서는 바로 유대인들에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10장으로 가면 이방인인 고넬료에게도 복음을 명백하게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게도 복음의 문을 베드로가 연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쓰임받은 그릇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우리는 때로 주목합니다만 베드로는 쓰임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자 겸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전서 5 1~3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여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너희 중이라는 의미 속에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 중에 있는 한 장로다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바울은 대체적으로 사도 바울이라고 서신에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이전에 실패했던 경험을 생각했기 때문인지 5 1절에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라고 해서 너희 중에 있는 특별한 장로가 아니라 동일한 한 장로라고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을 말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왔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치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계속 지켜왔기 때문에 목자로서 이 말씀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즉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 이렇게 하신 말씀을 순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본인이 이렇게 해오지 않았다면 이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공격해 올 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그 뒤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실패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0 17,18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인데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실패는 했어도 그것 때문에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계속 기억해 내면서 자기를 책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는데 왜 기억합니까? 베드로는 마귀가 존재하고, 그 마귀가 공격하고, 그 공격을 베드로는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은 베드로의 믿음은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 가면 베드로는 덕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 4~8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를 구원해 주신 분은 그 구원하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고 덕에 참여하게 하려고 구원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에 참여할 자들입니다. 4절 후반을 보면 그리스도인을 두고 하는 말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 능력도 주셨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까! 지옥 갈 자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한 것이 아니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런 식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놀랍습니다. 거기다가 덕을 더하는 것이 더 복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품격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덕 위에 지식은 성경을 읽는 것일 것입니다. 지식을 어떤 경우 많이 가지게 되면 뽐내기도 하고 그만 지식에 휘둘려서 절제를 잃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지식은 교만케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경건을 경건은 하나님 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답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형제우애를 더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일본의 옛날 성경에는 박애를 더하라고 했는데 지금의 성경에서는 사랑을 더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실족하지 않는다고 다음다음 구절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도 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인도자로서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자신도 잘 배웠다고 봅니다. 죄를 범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보다도 이와 같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2009 10 20일(화) 여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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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