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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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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본

노시로 키요지

요한복음 13 1~5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자기의 돌아가실 때 즉 가 나와있습니다. 때로 말씀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받으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 자신을 생각지 않으시고 제자들 즉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일어성경-사랑을 남김없이 나타내 주셨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앞에 고난이 예상되면 사람들에게 자기를 동정해 주도록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환자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돌보아 줄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앞으로 무서운 십자가를 지게 되지만 주님 자신을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들을 생각하셔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실 성경은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 이야기는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랑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느끼지 않으면 모르는데 느끼는 것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드러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할 뿐 아니라 반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못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가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을 통해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짓말이 하나라도 있다면 성경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다 즉 올바르다는 것은 33년 반 동안의 삶을 통해서 한번도 거짓말이 없었다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있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사랑을 남김없이 나타내 주셨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4절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스스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대단히 겸손한 일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과 서로 섬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하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해졌지만, 믿음생활도 발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때때로 더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10절에 보게 되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유월절 만찬을 하기 전에 제자들은 이미 목욕을 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샌들 같은 신발이었기에 제자들이 오면서 발이 더러워졌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모든 죄는 다 사해졌습니다. 피차간에 느끼겠습니다만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죄를 깨끗케 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상관이 없다는 것은 나와 교제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지만 교제는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것을 고백하고 자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생활을 할 때 죄를 범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는 반드시 고백을 해서 발을 씻듯이 죄를 씻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13,14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3절에서 제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선생이 먼저 나오지만 14절에서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라고 하시며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이 순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생은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생인 것과 동시에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가 주일학교에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가르침 받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구원받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을 불러서는 구원이 없으며 주라고 부를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선생이라고 먼저 생각을 했습니다. 14절에서 주님께서 일부러 그 순서를 바꾸셔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임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순종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보다도 가르침을 많이 행하셨는데 가르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발을 씻겨서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피차간에 섬긴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는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섬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새 계명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놓임을 받았습니다. 허무한 인생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참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문제의 해결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베드로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21절에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왜 이 자리에서 유다에 관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만약에 모르셨다면 제자들은 실족할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유다가 주님을 배반할 것을 몰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스럽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배반할 유다와 그 나머지 제자들을 차별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은 보이셨는데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주님은 유다는 안된다고 하는 언질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른 제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주님께서는 행동하셨습니다.

28,29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3년 반 동안 실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명백하게 아셨고 그래서 이 자리에서 발표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유다를 제자로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베드로의 배반을 예언하셨습니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둘 다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12명 중에 제일 뛰어난 제자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가 성경에 가득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으며 그 머리 회전이 상당히 빠르면서도 그 생각은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13장에서 주님께서 가룟유다에게 몇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태도에 대해서 유다는 주님을 무시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판단한 유다는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목을 매서 자살해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살한 것이 자기 책임을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환경적으로 보면 자기 죄를 자백하고 주님 앞으로 나갔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릅니다. 연약함이 있었기에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자 세번 부인한 것을 참으로 회개했습니다. 자책하고 회개는 다른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자신을 자책했는데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지만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 주님이 다시 한번 베드로를 목자로서 재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발을 씻는다는 것을 가르침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생님이시지만 그 이상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은 못박히시지만 자신을 생각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신 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2009 10 18일(일) 건덕 전주남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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