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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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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로 키요지

구약성경 룻기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저께 성경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은 먼저 문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은 그 이면에 있는 생각들을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독자가 태어났는데 그 독자가 자란 이후에 독자를 드리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독자 즉 사랑하는 독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 그대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말을 해석을 했더라면 하나님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상속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으로부터 태어난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말씀을 인간의 생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다르지 않는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드리라는 말씀대로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서 정말로 칼을 빼서 그 아들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 희생제물로 드리더라도 말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살려서 그 말씀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말씀을 가지고 양쪽 다 옳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양쪽 다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어떤 때는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말씀대로 믿는 것은 복됩니다. 그렇게 읽는 방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경 읽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만 룻기를 보기 전에 이 룻기는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하고 있기에 우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읽는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번째는 읽은 바가 현재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하면서 읽는 방식도 중요한데 그렇게 읽는 것은 복됩니다.

룻기는 먼저 역사적 사실로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여기에 예언이 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룻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믿음이 없는 가운데 모압으로 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주 받은 모압 족속의 룻이 구원받았습니다.

로마서 11 11~15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여기에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에게 축복이 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실족한 가운데 이방인이 복을 받으므로 시기가 일어나도록 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엘리멜렉이 믿음이 없는 가운데 이방에 갔는데 거기에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 경우에 룻은 몸된교회로서의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이 룻이 보아스의 신부가 됩니다. 모압을 생각하면 엄청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할 때에 롯과 그 두 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육의 생각으로 롯의 두 딸은 자녀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모암과 암몬이라는 족속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모암지방을 지나가고자 했을 때 모압 사람들은 거절했습니다. 물도 떡도 주려고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길을 차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모압 족속들은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하도록 바꾸셨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엘리멜렉은 그러한 모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룻기 1 1~3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엘리멜렉의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모압지방으로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엘리멜렉은 모압에 대해서 고려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땅은 원래 약속의 땅이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약속을 버리면 축복을 잃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엘리멜렉은 여러가지로 생각을 했다고 봅니다. 이 때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였기 때문에 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말기라는 (환경도) 더욱 더 나빴습니다. 사사기는 거의 전쟁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서 대적 앞에 정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많으시기 때문에 회개할 때마다 적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대적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도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혼란되어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자 되는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각각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원래 제사장은 아론의 직계가 아니면 될 수 없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어떤 사람이 월급을 받고 제사장 일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환경을 보고 모압으로 가도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영적으로 매우 낮은 상태에 있을 때 흉년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에는 흉년, 기근이라는 기사가 11번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나오는 기근은 아브라함 때였는데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삭 때는 블레셋 사람 쪽으로 이삭이 도망갔습니다. 기근은 큰 시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게 되는데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가족 모두를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갔다가 금방 돌아올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다가 거기서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엘리멜렉은 모압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했습니다. 율법 가운데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애굽인은 2,3대가 지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율법에서 말했습니다.

명기 23 3,4절에 의하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그 연유로 해서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선민이었습니다. 그 저주받은 혈통이 있는 그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했습니다.

3절에 보면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4,5절에는 저주받은 그 땅에서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세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무슨 말을 할꼬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힘든 장례식이었다고 봅니다. 회복 되지 못하고 저주받은 땅에서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묻힐 땅을 준비했고 거기에 묻혔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일부러 그 약속된 땅으로 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상복을 입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죽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물론 며느리 되는 룻과 오르바는 책임이 없습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세 명의 남자였습니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어버렸습니다. 어쨌던 거기 유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이후에 나오미는 소식을 접했는데 자기 백성들에게 떡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그 소식을 돌아가는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두 자부가 나오미와 함께 가고자 한 것은 나오미의 증거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은 아마도 이 두 모압 여인에게는 참된 하나님으로 이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자부는 나오미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나오미가 귀국을 하려고 할 때 함께 가려고 했습니다. 두 자부에게 내가 지금 아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너희들의 남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모압 땅에 머물라고 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오미를 비판해서 나오미가 그 자부들을 그 족속에게 돌아가라고 한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땅에는 준비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가보니까 거기에는 남편이 있었고, 떡이 있었고, 자녀가 있었고, 유업이 있었습니다. 함께 간 룻은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바도 갔다면 하나님의 준비는 충분했을 터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나오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에서 주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게 되면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다짐을 보기 위해서 나오미는 그 두 자부의 마음을 시험해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룻이 참된 하나님을 나오미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것입니다. 저주 받은 백성이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 룻의 말은 헌신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자유를 완전하게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자기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자기 고향 모압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룻은 자기의 종교를 버리고 참된 하나님을 믿었으며,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그것을 나오미에게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드렸습니다. 언제까지인고 하면 죽을 때까지입니다. 룻의 자유, 가지고 있는 소유 전부를 그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이것은 룻이 진심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헌신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헌신을 합니다. 자신의 자유와 여러가지 특권이 있지만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의무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며, 명령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여러가지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친한 분 가운데 재미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럭비를 좋아했습니다. 럭비에 관한 그 일에 열중해서 뉴스를 보기도 하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날 결심하기를 내가 럭비를 보는 자유와 럭비를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때부터 럭비에 관한 신문기사라든지 뉴스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 때문에 인생 전부를 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을 가져야 합니다. 두 렙돈을 드린 그 과부는 사실 생명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을 아주 소중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 나오는 룻이 나오미에게 드리는 것은 헌신이라는 것을 잘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을 듣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는 룻처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지식적으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은 놀랍습니다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오르바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복된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룻은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만 회개한 다음에는 변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회개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모압으로 간 것은 나오미의 책임이 아닌데 나오미는 자기가 간 것처럼 말했습니다.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우리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라고 하지 않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엘리멜렉이 가자고 해서 갔다는 그 책임의 소재를 자기에게 돌렸습니다. 이 말을 보게 되면 아들이 가자고 해서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엘리멜렉과 아들이 가자고 해서 갔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내가 라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 때는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당사자의 책임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이 회개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회개를 하니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돌아올 때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단을 쌓았다고 말했습니다.

회개에 관한 가장 좋은 예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입니다. 물론 탕자처럼 아버지를 배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였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나중이었습니다. 그 탕자는 기근을 만났을 때 회개했습니다. 탕자는 분발해서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준비를 하느라고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회개 할 때 자기의 명예에 관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채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있는대로 돌아간 것이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이 도출이 됩니다.

저도 교회진리를 모를 때 여러가지 잘못을 많이 했습니다. 말씀이 계시를 해 줄 때 그 말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본질을 알고 거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돌아갈 곳이 드러났기 때문에 복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맨손으로 돌아왔습니다. 10년간 모압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추구했겠지만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은혜로 말미암아 그 며느리가 한 사람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이 구원을 받았기에 은혜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의 결과와 같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동행자였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하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함께 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3장부터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오미한테는 경험이 있었고 룻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모임에서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지금도 일본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을 위한 세미나라든가 젊은이를 위한 세미나라는 집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노인이고 젊은이고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노인과 젊은이에 가르침은 따로 들었지만 그것은 한 모임 안에서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룹으로 노인들의 모임, 젊은이들의 모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로서 나이 차이가 없이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가르침을 따라 이삭을 주우러 갔습니다. 그러자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갔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겠지요. 그러나 룻은 나오미의 지도를 반듯하게 받았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4 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아무 것도 없던 나오미의 손에 룻의 아기를 품에 안았습니다. 사실 나오미는 이와 같이 축복을 가득 받았습니다. 모압에서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지만 회개한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나오미는 10년 동안에 여러가지 일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뿌린대로 거둔 것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한대로 여기에도 적용이 된 것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온 때는 보리를 추수할 때였습니다. 그때에 추수 때는 축하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축하하는 절기에 나오미는 손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절기에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10년 동안 일을 했지만 나오미 손에는 하나님께 드릴 예물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말의 의미는 영적인 의미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압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가 없으며 예배도 없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겠지요. 우리들이 만약에 모임에서 세상으로 간다면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친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만족될 수도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 진리적인 모임에 있다가 어느 교파로 갑니다. 한번 진리를 안 사람은 진리를 떠나 있는 그 교회에서는 절대로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들어가면 더욱 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어떤 아주 열심인 형제가 어떤 사정으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믿지 않을 때 술은 맛이 있었는데 믿고 나서 보니 술이 전혀 맛이 없다고 했습니다. 믿기 전에 옛날에 즐겼던 세상일이 구원받은 사람이 타락해서 그 때의 옛날 같은 즐거움이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복되지만 그 진리를 떠나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오자 나오미에게 필요한 환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리고는 그 손자마저 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빈 손에 안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회개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만약 실패를 한다면 또한 그러한 생각이 든다면 그 원인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갈 때 하나님에 대한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보고 시대 탓을 했을 것입니다. 어두운 사사기 시대였습니다. 만약 엘리멜렉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떠날 생각을 가졌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지 어떤지를 말이죠. 정신이 들면 회개할 곳으로 바로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2009 10 27일(화)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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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